查看原文
其他

[신철국 장편스포츠실화] 챔피언 1965 (13)

조글로 潮歌网 2020-09-15

 조글로   

       이슈 단체 인물 비즈 문학 력사  

제보광고검색pc버전| 건강|노래珍藏版|web



토일련재

 신철국  장편스포츠실화 

-1965년 길림성축구팀 전국축구 갑급팀련맹경기 우승 실록


연변인민출판사


개천의 룡들(1)


“3종1대”, 그것은 당시 국내경기체육에 서서히 도입되고있던 새로운 훈련원칙의 하나였다. 하다면 이제 곧 본격적으로 전개될 동계전지훈련에서 여기에 버텨낼 선수가 구경 몇이나 될가? 주력선수들인 정지승, 지운봉,허경수, 동경춘, 홍종우, 류진석, 문승학… 등이 과연 이러한 훈련을 이겨낼수 있을가?


그때 박만복의 눈앞에 선참으로 떠오르는 선수가 있었다. 100메터 거리를 11.2초에 주파하는 총알의 사나이 김석주였다. 1.71메터의 신장에 70킬로그람의 몸집을 가진 그는 정말이지 팀에 없어서는 안될 좌측수비수였다. 더우기 그가 길림성축구팀에 들어올적에 남긴 재미나는 일화 한토막은 지금 다시 들어봐도 눈앞에서 보는것마냥 생동하기만 하다.


1957년, 장춘에 본부를 두고있던 길림성축구팀에서 연변으로 선수모집을 내려왔을 때 연변배구팀에서 활약하고있던 김석주가 덜레덜레 시험장으로 찾아왔다. 시험이라는것을 보니 고작 달리기를 시켜보고 편으로 갈라 뽈을 차보이고 헤딩이나 드리블을 시켜보는 판이였으니 배구선수라지만 어딘가 신심이 생겼던가보다.


“쳇, 고까짓것.”

워낙 속도가 빠른데다가 축구에도 나름대로 자신만의 특기를 갖고있다고 자부할만큼 자존심이 강했던 김석주는 코를 벌름거렸다.


물 맑고 경치 좋은 화룡현 서가가 고향인 김석주는 부친 김경화, 모친 최경옥의 차남으로 1938년 7월 3일에 고고성을 울렸었다. 어릴적부터 특별히 공에 대하여 애착을 보였던 그는 때로는 축구장의 공격수로, 때로는 배구장의 공격수로 등장해 말 그대로 애시적부터 “뽈귀신”이라는 별호를 달고 다니던 인물이였다. 그러던 그가 어느 한번 공사(지금의 향)운동대회의 배구장에서 한창 날파람을 일구다가 마침 선수모집 겸 구경 삼아 내려왔던 연변배구팀지도의 눈에 들었다. 헌데 정작 배구를 시작하고보니 웬걸, 그의 눈길이 자꾸 배구가 아닌 축구로 쏠릴줄이야.


“저 김지도! 저두 한번 시험을 봤으면 하는데요.”

“동무가?”

당시 시험관으로 내려왔던 김사종(金仕钟)지도가 석주의 아래우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어디서 왔지?”

“고향은 화룡이고 지금은 연변배구대에 있습니다.”

“배구대? 근데 배구는 어쩌고 축구를…”

“그냥 축구가 더 하고싶어서…”


방문길에 쏘련체육관원과 함께 기념사진을 남기고있는 김석주(우 3).


“그래? 그럼 어디 나서봐.”

과연 자신심대로 석주는 운동장에 나서자 바람으로 모든 시험과목을 쉽사리 넘겨버렸다.

“허, 그 자식, 보기보다 다른걸.”

그러는 석주를 놀랍게 바라보며 김사종지도가 뜻밖의 흥분에 아래턱을 슬슬 어루만지는데 땀벌창이 된 몸으로 스적스적 다가오던 김석주가 롱구대옆에 이르러 슬쩍 몸을 솟구치는가싶더니 두손으로 벌떡 롱구틀의 림을 틀어잡고 연거퍼 현수운동을 해대는게 아닌가.

“아니?”

뜻밖에 벌어진 사태에 주위에 둘러섰던 사람들이 입을 딱 벌렸다.

희한한 탄력이였다.

“어허, 이 녀석 봐라?!”

김사종지도의 입이 떡 벌어졌다.

“합격!”

그런데 그놈의 즉흥표현이 일면 김석주를 길림성축구팀 선수로 합격시키고 또 일면 그를 한바탕 골탕 먹일줄을 누가 알았으랴.


“떡줄 놈은 생각도 안하는데 김치국부터 마신다”는 격으로 자신을 길림성축구팀의 주력공격수로 양성하는가 지레 짐작하고 당장 배구팀을 떠나 축구팀에 합류했더니 기막히게도 위치가 문지기, 그것도 후보문지기일줄이야. 젠장, 부아가 치밀었다. 이럴줄을 알았더라면 그런 쓸데없는 무모한 짓거리를 절대 하지 않는건데, 따라오지도 않는건데… 하지만 별수 없었다. 이미 엎지른 물이였다.


박만복은 피식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키꼴이 장대한데다 탄력마저 월등했으니 다짜고짜 문지기감으로 점찍어두었으리라. 헌데 본인은 그런줄을 모르고…

그해 겨울 광주에서 있은 동계훈련에서 김석주는 참다 못해 지도진을 찾아갔다. 자신의 뛰여난 속도와 체력을 증거로 위치변동을 요구한것이다. 뒤늦게야 석주를 료해한 지도진에서는 과감히 그의 청구를 받아들였다. 그때에야 비로소 수비수로 나선 김석주는 이듬해인 1958년, 전국축구 갑급팀련맹경기에서 길림성축구팀이 4등의 영예를 따내는데 마멸할수 없는 공훈을 세우기까지 하였다. 선수에 대한 지도진의 확실한 료해와 적당한 조절이 전 팀의 운명을 바꿔놓은것이였다. 그러니 무엇보다 선수에 대한 확실한 료해가 전 팀의 승패를 결정한다고 봐야겠다.


그 점을 박만복은 누구보다 잘 알고있었다. 그의 눈앞으로 전팀의 선수들이 하나하나 클로즈업되여 지나가고있었다.



개천의 룡들(2)


1961년에 연변조선족자치주 수부도시인 연길로 본부를 옮긴 길림성축구팀은 당시 을급팀으로 활약하고있던 연변청년축구팀중에서 선수 약간명을 받아들였다. 홍종우, 허경수, 류진석, 문승학 그리고 문지기 박장수가 그들이였다.


공이 날아오는 방향을 정확하게 읽고 기민하고도 날렵하게 길림성축구팀의 존엄을 고수해오던 “철대문”-박장수. 원 문지기동량일(한족)의 후임으로 당당히 1번 유니폼을 입은 그는 고향이 연길현(지금의 룡정시) 석정이였는데 1936년생으로서 신장은 1.87메터, 체중은 80킬로그람, 100메터 속도는 12.8초였다…


2번 김석주, 신장 1.74메터, 체중 72킬로그람, 100메터 속도 11.2초. 1938년 7월 3일, 화룡현 서가에서 출생.


3번 당봉상(唐凤翔), 당시 팀의 유일한 한족. 신장 1.78메터,체중 75킬로그람, 100메터 속도 11.8초. 1939년, 장춘에서 출생.조선말은 욕설이나 알아듣는 정도. 특기는 헤딩, 애호는 독서, 개방형적인 성격.


그무렵, 길림성축구팀의 수비위치에서 활약하고있던 당봉상은 후날 퇴역한 뒤 길림성체육운동위원회, 국가체육운동위원회를 거쳐 최종 중국당구협회 비서장으로 근무했다. 그 시기 그의 엄격한 감독아래 정준휘(丁俊晖, 1987년생)라는 세계적인 스누커(당구게임의 일종으로서 22개의 뽈을 사용하여 승부를 결정하는 경기.)스타가 탄생했다.


4번 류진석, 신장 1.70메터, 체중 65킬로그람, 100메터 속도 11.6초. 연길현 동성용 출생. 좀 과묵한편이지만 꼴욕심이 많고 부지런한것으로 파악됨.


5번 홍종우, 신장 1.75메터, 체중 72킬로그람, 100메터 속도 11.5초. 1937년, 왕청현 배초구 출생. 활발한 성격이고 직통배기.

내구력이 좋은것이 특징. 결점이라면 자기 주장이 너무 세고 고집이 강함. 과외애호는 장기.

장기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 1962년, 광주에 자리 잡은 동계훈련기지 이사도에서 있은 일이다.


점심휴식시간에 홍종우가 이 세상에 장기로는 자기를 당할자가 없다고 큰소리를 땅땅 치는데 지청룡이 슬그머니 다가와 한판을 청했다. 길림성축구팀의 설립 초창기부터 주력선수로 등장했던 원로축구인 지청룡, 그가 축구를 하는것은 봤지만 장기를 두는 것은 둘째치고 훈수하는것마저 여적 한번도 본적이 없는 홍종우는 속으로는 어딘가 미심쩍었으나 인차 태연한척하며 장기판을 마주했다. 지청룡의 절묘하고도 날카로운 슛을 홍종우는 너무나도 잘 알고있었다. 그만큼 그는 홍종우에게 있어서 교과서와도 같은 존재였다. 언젠가 지청룡이 훈련도중에 문전에 날쌔게 뛰여가 힘껏 슛을 날렸는데 뽈이 철렁 그물에 걸리자 나무로 만든 꼴대가 한동안 부르르 떠는것을 홍종우는 분명 두눈을 부릅뜨고 보았었다. 그만큼 대포알 같은 슈팅력을 자랑하는 쌩쌩한 사나이 지청룡, 허지만 장기에 들어가서는 자기를 당하지 못할것이라고 홍종우는 자신

하고있었다. 헌데 이게 웬 일인가! 안하무인에 교오자만이 극치로 치달았던 모양인지 길림성축구팀의 대표적인 장기의 귀재 홍종우가 단 세수에 지씨로부터 장훈을 받고 굳어져버리고만것이다.

(세상에…)

그뒤로부터 장기판에서 종우의 목소리가 좀 낮아지긴 했지만…


조선방문길에 장기를 두고있는 길림성축구팀 선수들.


그와는 달리 6번 정지승은 침착하고 심중한 사람이였다. 말 한마디를 하여도 앞뒤를 고려해서 하군 했다. 눈으로 많이 보고 살피는 내성적인 성격이 어딘가 전 팀의 생활을 책임진 주장으로서의 무게를 더해주고있는듯싶었다. 신장 1.73메터, 체중 70킬로그람, 100메터 속도 11.6초…


1938년 11월 3일, 조선 충청북도 진천에서 부친 정호연, 모친 리팔분의 자녀 5남매중 장남으로 태여난 정지승은 다섯살 때 부모님을 따라 중국으로 이주한후 수분하, 돈화 등지를 전전하다가 1946년에 연길에 거주하면서 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학교에서 천부적인 재질로 달리기, 높이뛰기, 스케트, 호케이, 축구 등 체육과를 모두 석권해버리는가 하면 공부도 뛰여나게 잘해서 어렵잖게 연변제2고중에 진학했다. 군수품공장에 다니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특별히 리과에 심취한 지승이는 학생시절에 자체로 모터를 조립해내는 솜씨를 보이기도 했다.


그러던 1958년 7월, 추천명액 두개중에서 하나를 얻어 남들의 부러움을 자아내며 동북사범대학에 입학한 정지승은 거기에서축구를 하면 성공할수 있다는 체육학부 리태묵 1) 선생의 인도아래 진작부터 입단하라고 유혹해오던 길림성축구팀으로 단연 발길을 돌렸었다. 그것은 그가 동북사범대학에 추천받아 입학한지 불과 석달이 되는 10월경의 일이였다…


1) 1932—1998년, 국가급축구심판원. 다년간 동북사범대학 체육학부 주임, 당총지서기로 사업. 교수, 석사연구생 지도교원. 1988년, 제24회 서울올림픽 학술대회에 참석. 생전에 중국축구협회 심판위원회 위원, 길림성축구협회 부주석, 길림성체육학회 상무리사로 활약.


그때 정지승이 리태묵선생의 말을 따르게 된데는 남달리 축구를 사랑했던 점도 크게 작용을 했지만 한 면으로는 리태묵선생이 전국체육교육분야에서 권위자라는 신분도 크게 한몫했다. 축구를 어느 정도 한 다음 다시 공부를 해도 늦지 않다는 무언의 암시가 모름지기 그의 운동신경을 감질나게 했을것이다.


1932년에 화룡현 투도구에서 태여난 리태묵은 1950년, 투도광흥중학교를 졸업한 뒤 1952년 7월까지 룡정에 있는 연변고중에서 공부했다. 박만복보다 두기 선배로서 동문수학했던 리태묵, 근6년간의 중학시절, 그에게 체육학의 씨앗을 심어준이는 당년 광흥중학교와 연변고중에서 체육교원으로 명성을 날리던 채송철선생이였다. 일찍 초중시절부터 그의 체육재질을 발견한 채송철선생은 그가 향후 체육학을 전공할수 있도록 흥취를 돋궈주고 여러모로 이끌어주었다.


연변고중에 입학해서부터는 줄곧 학교축구팀 대장으로 활약했던 리태묵은 1952년 9월에 동북사범대학 체육학부에 입학하여 1956년에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본교 체육학부 축구강좌에 교원으로 남으면서 뭇사람들의 부러움을 자아냈다. 대학시절에 공부에 열중하면서도 한시라도 축구공을 떠난적이 없었던 그는 그때로부터 교편을 잡는 한편 장춘시청년축구팀의 대장 겸 지도를 맡아보면서 전국적인 시합에 수차 참가했다. 그러다가 전국에서 몇 안되는 조선족심판으로 일약 도약해 축구심판사업에서 필요한것들을 차근차근 쌓아가고있는중이였다.


“백락” 리태묵의 추천으로 길림성축구팀에 합류한 정지승은 과연 “천리마”답게 팀의 중견으로 서서히 뿌리 박고있었고 지운봉과 함께 수시로 선발진영에 포함되며 탄탄한 경험을 쌓아갔다. 특출한 구석이 없지만 일단 그가 리드하고있는 방어선을 대하면 동료선수들을 비롯해 지도, 팬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시름을 놓았고 뒤심이 든든해하군 하였다.

정지승과 지운봉은 어릴적부터 막역한 송아지친구였다.


(헌데 소문에는 그들이 요즘 서로 별로 말이 없이 지낸다던데… 이건 도대체 어찌된 일이지?)


박만복은 그들의 반상적인 사이를 당분간 리해할수가 없었다.

혹시 화합에 이상이라도 생기는 날이면 팀은 투지를 상실할것이고 조만간 불화라는 암초에 부딪쳐 침몰해버릴것이였다.


실패뒤에 오는 이 교훈은…

박만복은 이제 훈련기지에 도착하자 바람으로 두 선수를 찾아 얘기를 나눠보리라 작심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상급에서는 길림성축구팀이 여느 팀들과 달리 2선팀이 없는 실정을 고려하여 후비력 양성을 위해 “중형땅크” 리광수를 소환해서 이번 동계전지훈련에 파견했다.


현유의 길림성축구팀은 시급한 세대교체가 필요했다. 왜냐하면 지난해 갑급팀련맹경기를 앞두고 “동무 따라 강남 간다”는 식으로 무작정 조선으로 건너가버린 로장(문정오, 송지학, 유성근, 채수운, 김영기 등)들의 빈자리를 한시바삐 메워야 했기때문이였다.

(계속)


[신철국 장편스포츠실화] 챔피언 1965


차례(지난 기사는 클릭해 볼수 있습니다)

제1장 시련의 계단

봉변/기회의 신(神)결심출국 류학스승의 마음 문제는 어디에?축구의 고향 잊은것과 잃은것/ 어려운 세월에 제로의 답안 /맨발의 선수 첫발자국 /희망을 향하여 


제2장 재기의 언덕

“백전로장” 원수(元帅)가 준 별호 /최초의 전설들(1) 최초의 전설들(2) /

새로운 출발 /“3종1대”/개천의 룡들(1) 개천의 룡들(2) 이사도(二沙岛) 

희로애락 “몰인정”했던 리유 뒤로 밀린 리발 신입대원 정동권 

제3장 승자는 말한다

원자탄 불청객 분노의 벽 빅장대결 귀로의 기쁨 영광의 서장(1) 영광의 서장(2) 불멸의 승부(1) 불멸의 승부(2)




신철국

작가


연길명동문화예술원

부원장

【신철국 작가 프로필】

1971년 왕청현 하마탕향 전하촌(汪清县蛤蚂塘乡前河村)출생

연변대학 조선언어문학학부 졸업


연변민족문학원(제1기/1994년), 로신문학원(제30기중청년고급연구토론반·아동문학/2016년) 수료.


‹중국조선족백년실록›집필위원회 위원(스포츠) 력임.


연변텔레비죤방송국 청소년부, '흑룡강신문','길림신문'에서 다편간 편집, 기자로 활약. 연변작가협회 회원.


1986년 아동소설 '신방주인'으로 등단.


'화신문학상','압록강문학상','흑토문학상','연변라지오문학상','상익컵 실화문학상' 등 수상경력 다수. 


단행본 장편스포츠실화 ‹챔피언 1965› 출간.


공저로 ‹60주년에 만난 60인›, ‹중국조선족백년실록›, ‹연변축구의 발자취를 찾아서› 등이 있음.


현재 명동문화예술원 부원장 겸 글짓기지도로 근무.



 안내 : "문학작품"은 sinbalam과 위챗친구하여 보내주시면 등재해드립니다.-신바람


최신 작가와 작품

2020년 최신 작품
(단편) 불조심 (김정권)
[현춘산] 남영전토템시로 본 토템문화 1. 달, 영구한 생명력의 상징[문학닷컴] (회고) 김학철선생님 인상기 (남룡해)[추모글] 묵(墨)향 천리, 덕(徳)향 만리-(림장춘)

[구술60] 나젊은 비서와 정률성음악회 (박장수 편 2)[신철국 장편스포츠실화] 챔피언 1965 (11) 최초의 전설들
 문학작품 더 보기(请点击) 


2020년 작가
칼럼리성일김혁채영춘리성일우상렬허명철박광성강효삼리성일장동일박광해최학송박승권김혁현춘산채영춘주소란|박광성|예동근|김범송김경애김문일김광림리동렬김정룡문학김정권|현춘산|남룡해림장춘궁금이김창영허강일궁금이회령김정권최상운김훈지향옥림운호김병민손룡호궁금이렴광호리해란서가인신철국최화길손룡호허강일이문혁김학철김혁림원춘허미란박장길렴광호김재현김수영김두필김일량남영전현춘산서가인리문호리광인김혁한석윤|허미란김학송김호웅남룡해김정권김영분림운호장학규리련화한영철김경진김영택김병민김복순최상운회령채영춘김명숙류영자김춘실류재순려순희김홍남윤청남리동춘심명주최화김명순 [현춘산] 남영전토템시로 본 토템문화 1[허강일 추리소설] 도시는 알고있다18[허강일 추리소설] 흉수는 바로 그놈이였다력사[구술] 김학철(7)[珍藏版]리광인 '70년대 사람들'|[구술] 남영전(1) (2) (3) (4) (5) (6) 양림(구술)채영춘(10) 리광인 실화문학《아,나의 중학시절이여》(구술)림원춘(7) |특집[珍藏版] 우리말 어원 산책(렴광호)



조글로·潮歌网조선족 정보 총집합!





    您可能也对以下帖子感兴趣

    文章有问题?点此查看未经处理的缓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