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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철국 장편스포츠실화] 챔피언 1965 (10) “백전로장”/원수(元帅)가 준 별호

조글로 潮歌网 2020-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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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일련재

 신철국  장편스포츠실화 

-1965년 길림성축구팀 전국축구 갑급팀련맹경기 우승 실록


연변인민출판사

쏘련원정경기를 앞두고 현지인들과 기념촬영을 하고있는 초창기

길림성축구팀.


“백전로장”


1963년 11월 18일, 경광선(京广线) 일반석 7호차.

한 무리 끌끌한 조선족젊은이들이 부석부석한 얼굴로 물끄러미 창밖을 바라보고있었다.

보슬비가 내리고있는 창밖.

“허, 여기는 벌써 봄이군.”

피발이 선 눈으로 지그시 창밖을 응시하고있던 려객들중에서 누군가 불쑥 입을 열었다.

“지금쯤 우리 그쪽은 눈이 오려고 하겠는데…”

“그럼.”

귀가에 가져간 반도체라지오에 잠자코 귀를 기울이고있던 리광수는 그 말에 천천히 창밖으로 머리를 향했다.


남으로, 남으로 안개 자욱한 평야의 새벽을 깨우며 줄기차게 달리던 남행렬차는 어느덧 중원의 복지인 하남성소재지 정주(郑州)를 지나 춘추전국시기 한(韩), 위(魏), 촉(楚)이 할거해있었던 허창(许昌)으로 질주하고있었다.


“덜커덕덜커덕…”

길림성축구팀에 있어서 굴욕의 한페지를 남겼던 1963년의 한해도 바야흐로 저물어가고있었다. 공식적으로는 “3년자연재해시기”로, 민간에서는 “3년대식품(代食品)시기”로 각각 불러왔던 고난의 시기도 서서히 물러가고있었다.

(이제 령으로부터 시작해야 하겠지.)


사업회보차로 장춘에 들린 주지도 박만복 대신 선수들을 휘동해 동계훈련을 떠난 “백전로장” 리광수의 너부죽한 이마에 깊은 주름이 패여있었다.

“우리 길림성대는 전국에서도 이름난 강팀입니다. 그런데 을급으로 강등하다니요. 이건 참 생겨서는 안될 기 막힌 일입니다.

꼭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한번 본때를 보여주잔 말입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번의 실패를 거울로 삼고 경험, 교훈을 참답게 섭취하여 다시 갑급대로 진출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동무들을 믿습니다. 동무들의 실력은 절대 을급대로 떨어질만큼 약하지 않습니다.”

“연변인민들, 나아가서는 전국의 조선족들이 동무들을 지켜보고있습니다. 동무들은 절대 혼자가 아니라는걸 명심하기 바랍니다.”

광주로 향발하기전 연변체육운동위원회에서 가졌던 동계전지훈련동원대회에서의 그 열렬했던 기분 그리고 격려, 축원, 희망의 메쎄지… 정녕 그것은 목 마른 사람의 갈구와 같은것이 아니였던가.


“체육운동을 발전시켜 인민의 체질을 증강시키자”는 모택동주석의 제사가 장중하게 걸려있던 겨울철훈련동원대회 회장 그리고 연변주위 문교책임부 서기 김문보, 연변대학 체육학부 주임 채송철, 연변체육운동위원회 주임 황택균, 연변축구협회 주석 최동현, 연변축구협회 비서장 박로석… 리광수의 눈앞으로는 동원대회에 참석했던 연변조선족자치주와 각 현시 해당 부문 책임자들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뿡-”

기적소리가 터졌다.

리광수는 손에 들고있던 반도체라지오를 탁상우에 올려놓으며 앞좌석에 마주앉은 정종섭을 넌지시 바라보았다. 애숭이 정종섭은 려로에 지쳤는지 끄떡끄떡 졸고있었다. 어린 나이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게 선배들을 따라 남정북전으로 고역을 치르고있는 꼬맹이의 그 초췌한 모습이 어딘가 가긍해보였다. 아직은 벤취를 지키는 후보라고 하지만 주력대원 못지 않게 칠전팔기로 훈련

에 열심을 보이는 정종섭, 아마 그도 이번 길림성축구팀의 실패로 하여 마음 한구석에 타격을 받았으리라.


정말이지 길림성축구팀의 초창기 멤버인 “백전로장” 리광수에게 있어서 길림성축구팀의 어제는 너무나도 찬란한것이였다.


그만큼 잔디밭에서 풍상고초를 겪으며 하룡원수로부터 “중형땅크”라는 어마어마한 별호를 선사받기까지 그의 축구생애는 길림성축구팀과 더불어 그토록 휘황찬란했었다.


원수(元帅)가 준 별호


1950년 8월 15일.

인산인해로 초만원을 이룬 룡정시운동장은 박수소리, 환호소리, 응원소리로 법석 들끓고있었다. 해방기념운동대회에서 연변고중팀과 룡정1중팀간의 축구결승전이 한창 벌어지고있었던것이다. 헌데 어이없게도 연변고중팀은 전반전에 벌써 꼴 세개나 먹고 0대3으로 끌려가고있었다.


“젠장, 어찌된 영문이야!”

지원군참군수속사무실에 갔다가 뒤늦게야 달려온 리광수는 경기장밖에서 성난 사자처럼 안절부절 못하다가 급기야 입고있던 옷들을 훌훌 벗어던지고 운동복으로 갈아입기 시작했다. 호듯호듯한 해빛에 건장한 몸체가 구리빛으로 드러났다.

“자, 뽈을 일구라구.”

0대3이라는 점수에 본교의 사생들마저도 인젠 틀림없이 지게 된 경기라고 너나없이 실망하고있을 때, 바로 후반전에 연변고중팀의 자존심 리광수가 구성처럼 등장한것이다.

“그렇지, 광수가 나왔다!”

“뭐, 광수가? 이제야…”

“옳지. 이젠 됐다, 됐어!”

관중석의 환호성 그대로 리광수는 과연 축구의 신(神)이였다.

진짜 연변고중팀의 구성이나 진배 없었다! 한점 흐트러짐이 없는 몸가짐으로 침착하게 공을 받아가지고 전쟁터의 로련한 지휘관마냥 휘익 장내를 둘러보며 척척 찔러주는 공, 그것이 그렇게 절묘할 수가 없었다. 장내의 관중들도 그러한 광수의 표현에 탄성과 함께 박수갈채를 보냈다. 일시에 연변고중팀의 공격에 변화가 일어났다.


자로 잰듯이 빈틈을 찾아 창살같이 찔러주는 리광수의 “탄약수송”과 함께 그의 번개같은 보조공격이 개시된것이다.

“광수야!”

“그렇지, 받아라.”

“슛-”

“와- 꼴이다!”

1대3!

“그렇지, 또 광수다.”

“슛! 와-”

“꼴, 꼴이다!”

2대3!

“와- 또 꼴이다!”

“만세!”

“잘한다!”

3대3!

리광수의 무차별폭격이 문이라도 열었는가. 후반전에 들어서서 완전히 경기주동권을 틀어쥔 연변고중팀, 이제 전반 경기의 종료시간도 바야흐로 다가오고있었다. 허지만 질수도, 비길수도 없는 경기임을 광수는 너무나도 잘 알고있었다. 며칠후에는 전선으로 나가야 할 광수에게 있어서 이번 경기는 최후의 경기일지도 몰랐던것이니…


기회가 또 생겼다. 광수는 부리나케 상대편 문전으로 질풍같이 공을 몰고 쳐들어갔다. 수비수들이 이중삼중으로 그의 발밑을 바라고 달려들었다. 아마도 최후의 슈팅기회를 잡은것 같았다. 감각이 좋았다. 끈질기게 달라붙는 방어수를 홱 따돌리며 우측 외곽지역으로 깊숙이 파고들어가던 광수, 문대안에서 당황한 표정으로 어쩔바를 모르던 상대방 문지기가 담장구석으로 수탉 몰아가 듯 두팔을 쫙 벌리고 덮쳐나오던 그때였다. 옜다, 받아라! 공밑에 슬쩍 발끝을 밀어넣은 리광수의 마당발이 건뜻 우로 쳐들렸다. 찰나, 리광수의 발끝에 걸린 공은 재주라도 부리듯 문지기의 머리우를 넘어 공중으로 날아오르더니 저만치 문대를 향해 휘익 포물선을 그었다. 철렁! 뒤미처 묵직하게 꼴망이 흔들렸다.

“와—”

“꼴이다, 꼴!”

“앗!”

순간, 광수는 노도와 같은 함성속에서 푹 쓰러지고말았다. 천만 뜻하지 않은 역전패에 몹시 화가 난 상대방 선수가 무모하게도 광수의 정갱이를 냅다 걷어찼던것이다…


길림성축구팀을 대표해 조선방문시합에 나선 리광수(좌 2)선수.


1930년 4월 5일, 룡정시 조양천진 덕신촌의 한 농민가정의 2남1녀중 둘째아들로 태여난 광수는 튼튼한 아버지, 어머니를 닮아서인지 천성적으로 신체소질이 뛰여났고 머리도 남달리 총명했으며 운동에도 천부적인 자질이 있었다. 8살 때부터 조무래기들과 어울려 축구를 즐긴 그는 남보다 빼여난탓에 선참으로 간도학교축구팀에 뽑혔고 초중, 고중 시절에는 학교축구팀의 주력공격수로 출중한 돌파력을 과시했다. 뿐만아니라 륙상, 배구, 롱구, 테니스, 야구, 탁구 등 운동에도 능했으며 공부도 늘 학년에서 앞자리를 차지했다. 그러던 그가 교내 모든 활동에도 적극 참가하고 사상품성도 우수했던 모범학생답게 조선전쟁이 발발하자 나라의 부름에 응해 이날 지원군 입대를 신청했던것이다.


며칠후, 광수는 그렇게 하고싶은 공부를 접어두고 9명의 동학들과 함께 채 낫지 않은 “축구상처”를 지닌채 조선전쟁터로 향했다. 연변고중 2학년 때 있은 일이다.

10월말, 그가 소속된 중국인민지원군 제38군 제114사는 압록강을 건넜다.

1951년 양력설, 38선을 넘었다.

1951년 음력설, 한강을 건넜다.

그와 함께 참군했던 대부분 전우들이 그 처절한 전투속에서 장렬히 희생되였다. 전우를 잃은 슬픔에 광수의 가슴은 미여지는듯했다.



광수는 전령병으로 초연속을 뛰여다녔다. 그러던 1953년 3월이였다. 3등공을 세운 리광수에게 지원군 총정치부에서 갑자기 전근령을 내렸다. 며칠낮, 며칠밤을 거의 뜬눈으로 새우다싶이 하며 목적지에 이르고보니 놀랍게도 지원군축구팀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알고보니 지원군총부에서는 1951년에 축구팀을 꾸렸었는데 축구팀의 조선족선수들이 지원군에 입대한 리광수가 축구를 잘한다고 하기에 3년 동안이나 그를 수소문했다는것이였다. 1953년 7월, 드디여 조선전쟁이 끝났다. 원만히 임무를 수행하고 귀국한 광수는 채 하지 못한 공부를 마저 끝내야겠다고 뼈물었다. 중국대표팀과 쌍벽을 이루던 8.1팀에서 대우를 잘해줄터이니 입단하라고 그를 요청했지만 단연히 거절하고 고향 연변으로 직행했다.


이른바 “항미원조, 보가위국”의 선전때문에 학업을 중단하고 참군했던 그한테 있어서 평화시기의 축구는 학업에 비하면 그냥 과외운동에 지나지 않았던것이다.

“연변의 첫 고중인 연변고중의 창립을 열렬히 축하합니다. 고중은 대학으로 가는 다리입니다. 우리는 조국과 인민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공부를 잘하여 꼭 대학에 진학할것입니다.”

1950년 3월 17일, 연변고중 창립대회에서 학생대표로 나가 도도하게 열변을 토했던 광수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귀국하자 바람으로 채 하지 못한 공부를 마저 해야겠다는 일념으로 연변제3고급중학교(한족학교)입학시험을 쳤는데 전격 합격했다. 당시 광수의 나이가 26세, 그의 초중동창, 고중동창들은 진작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진출한 뒤였다. 허나 그의 불타는 구지욕은 그 누구도 막을수가 없었다. 꺾을수도 없었다. 중학시절에 학교 청년단 간부로, 학생회 주석으로 활약했고 연변고중에 입학할 때에는 300여명 학생들중에서 2등의 성적을 따내였던 광수가 아니였던가.


하지만 가루 팔러 가니 바람이 분다고 광수가 한창 머리를 싸매고 공부에 전념하고있을 때 상급에서 그를 찾았다. 그더러 연변축구팀의 선수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대련에서 치르는 전국시합에 참가하라는것이였다. 광수는 두말없이 책가방을 둘러메고 그번 시합에 나섰다. 한편 짬을 내여 틈틈이 밀린 학업을 자습했다. 헌데 그 시합이 결속돼서 얼마 지나지 않아 길림성축구팀을 설립하니 당장 그리로 오라는 통지가 또 날아들줄이야!


이제 학교를 떠나면 영영 공부를 못할것이니 제발 시름 놓고 공부하게 해달라고 광수가 빌다싶이 사정을 했지만 상급에서는 한마디로 일축해버렸다.

“당원으로서 당의 수요에 복종해야 하지 않겠소. 엉?”

그 말에 광수는 말문이 꺽 막히고말았다. 당기앞에서 그렇게 선서했던 광수가 아니였던가!

“운동을 하는것도 나라와 인민의 수요”라는 애국주의사상이 모든 선수들의 뇌리에 붉디붉게 각인되여있던 그 시대, 개인의 욕심은 한낱 부질없는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 시각, 차창으로 흘러가는 전야를 멍하니 바라보며 광수는 달콤한 명상에 젖어있었다.


1956년 여름, 길림성축구팀은 심양에서 있은 평가전에서 국가청년팀을 1대0으로 제압하였다. 자존심이 크게 상한 국가청년팀은 그해 겨울 길림성축구팀을 상해에 불러 재차 자웅을 겨뤘지만 1대1로 무승부를 기록하는데 그치고말았다. 그번 두차의 시합에서 길림성축구팀의 중앙공격수로 활약했던 리광수는 중형땅크마냥 대방의 삼엄한 경계를 뚫고 무한질주하여 적진을 료정내는 과감한 용맹성과 출중한 돌파력으로 좌중의 하나같은 찬탄을 자아냈다. 마침 그때 현장에서 친히 이 “룡쟁호투(龙争虎斗)”를 목격했던 국무원 부총리이며 국가체육운동위원회 주임이였던 하룡원수가 특별히 리광수를 단독으로 접견했다. 그는 조선족선수들이 중국축구발전에 공로가 크다고 하면서 광수를 용맹하고 완강한풍격을 갖춘, “중형땅크”와도 같은 훌륭한 조선족청년이라고 높이 치하하였다. 그리고 조선족으로 무어진 길림성축구팀의 정황을 자세히 물어보더니 겨울을 따뜻이 지내라고 하면서 친히 모든 선수들에게 겨울솜옷을 선물하기까지 했었다. 중국체육사상 나라의 원수(元帅)가 처음으로 한 지방의 축구팀에 보내준 따뜻한 선물이였다. 그해 광수는 제16차 올림픽 예선경기 출전준비로 구성된 중국국가대표팀에 일약 발탁되였고 전국의 축구팬들로부터 이름 대신 “중형땅크”라는 별호로 널리 불리기 시작했다. 그후 다년간 길림성축구팀의 주력공격수로 활약하면서 “땅크”라면 전반 축구계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그라운드를 누볐다.


그해 하룡원수는 상해시 홍구체육장에서 동계전지훈련을 하고있던 길림성축구팀 전체 선수들을 두번째로 접견하고나서 의미심장한 말씀으로 길림성축구팀의 사기를 진작시켜주기도 했다.


“길림성축구팀은 국가팀의 기술을 따라배우고 국가팀은 길림성축구팀의 풍격을 따라배워야 하겠습니다.”

하룡원수의 이 말씀은 전체 길림성축구팀 선수들한테 있어서 진정 커다란 동력이 아닐수가 없었다. 그들이 20세기 50년대말,60년대초에 전국적인 축구시합에서 거둔 눈부신 성과만 보아도 그 점을 여실히 증명하고있다.


1955년, 전국축구련맹경기 7등

1956년, 전국축구련맹경기 5등

1957년, 전국축구 갑급팀련맹경기 7등

1958년, 전국축구 갑급팀련맹경기 4등

1959년, 전국 제1회 운동회 8등

1960년, 전국축구 갑급팀련맹경기 4등

1961년, 전국축구분조경기 8등

1962년, 전국축구 갑급팀련맹경기 8등

1962년, 전국축구 갑급팀련맹경기 5등


헌데 1963년 전국축구 갑급팀련맹경기에 이르러 그만…

추억은 황홀해도 그것은 이미 지나간 과거로 되였다. 단 한번의 패배는 너무나도 침중한것이였다. 그렇다면 길림성축구팀과 함께 성장해온 내가 이제 해야 할 일은 무엇이며 또 해나가야 할 일은 무엇일가 하고 리광수는 “중형땅크”다운 고민을 했다.


1959년, 제1회 전국운동대회 1) 에서 국가체육운동위원회로부터 손중천, 방정훈, 최철봉 등 동료들과 함께 축구운동건장칭호를 수여받았던 리광수의 미간이 더욱 찌프려졌다. 어느덧 그도 34세의 언덕에 올라와있었다.


1) 이해 길림성축구팀은 8등을 하였고 길림성축구팀 이외 조선족선수들로 구성된 흑룡강성팀은 11등을 하였다. 1959년, 목단강지역의 조선족선수들을 핵심으로 한 흑룡강성축구팀은 길림성축구팀 다음으로 절대 대부분이 조선족선수들로 구성된 성급축구팀이였다. 흑룡강성팀은 이해 제1회 전국운동회에서 강호들을 물리치고 결승단계경기에 출전해 전국축구 갑급팀행렬에 진출했다.


(계속)


[신철국 장편스포츠실화] 챔피언 1965


차례(지난 기사는 클릭해 볼수 있습니다)

제1장 시련의 계단

봉변/기회의 신(神)결심출국 류학스승의 마음 문제는 어디에?축구의 고향 잊은것과 잃은것/ 어려운 세월에 제로의 답안 /맨발의 선수 첫발자국 /희망을 향하여 


제2장 재기의 언덕

“백전로장” 원수(元帅)가 준 별호 최초의 전설들(1) 최초의 전설들(2) 

새로운 출발 “3종1대”개천의 룡들(1) 개천의 룡들(2) 이사도(二沙岛) 

희로애락 “몰인정”했던 리유 뒤로 밀린 리발 신입대원 정동권 

제3장 승자는 말한다

원자탄 불청객 분노의 벽 빅장대결 귀로의 기쁨 영광의 서장(1) 영광의 서장(2) 불멸의 승부(1) 불멸의 승부(2)




신철국

작가


연길명동문화예술원

부원장

【신철국 작가 프로필】

1971년 왕청현 하마탕향 전하촌(汪清县蛤蚂塘乡前河村)출생

연변대학 조선언어문학학부 졸업


연변민족문학원(제1기/1994년), 로신문학원(제30기중청년고급연구토론반·아동문학/2016년) 수료.


‹중국조선족백년실록›집필위원회 위원(스포츠) 력임.


연변텔레비죤방송국 청소년부, '흑룡강신문','길림신문'에서 다편간 편집, 기자로 활약. 연변작가협회 회원.


1986년 아동소설 '신방주인'으로 등단.


'화신문학상','압록강문학상','흑토문학상','연변라지오문학상','상익컵 실화문학상' 등 수상경력 다수. 


단행본 장편스포츠실화 ‹챔피언 1965› 출간.


공저로 ‹60주년에 만난 60인›, ‹중국조선족백년실록›, ‹연변축구의 발자취를 찾아서› 등이 있음.


현재 명동문화예술원 부원장 겸 글짓기지도로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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