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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 영웅부대의 일등공신-관국형을 그리며 (김병민)

조글로 潮歌网 2020-09-15



영웅부대의 일등공신-관국형을 그리며


김병민 (전 연변대학 교장)



함관국(观国) 상좌

 

내 고향 향수촌 사람들은 마을에서 출세한 사람이면 너나없이 모두 기억한다. 기억할 뿐만 아니라 타고장 사람과 만나면 마치 자기네 집안 일처럼 자랑한다. 아마도 그들이 가장 큰 자랑으로 생각하는 것은 군인가족인 함씨네 집안의 삼형제 고위급 군관일 것이다. 

함씨네 집안의 맏이 류충록(이붓형제) 대좌는 1946년 14살에 입대하여 국내혁명전쟁과 조선전쟁에 참가했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석가장군관학교를 거쳐 북경에 있는 중국인민해방군 공군사령부에서 정보처 처장,사단장급 전원(专员)으로 임직했다. 둘째 한관흥은 녕안에 있는 한족고중을 졸업하고 북경포병학교에 입학했다. 졸업 후 동존서부대의 퇀장, 부사단장, 할빈시 위수구 부사령원 등 직을 력임했다. 넷째 함관국은 38군단 통신퇀 퇀장이였다. 셋째는 군대에서 5년간 복무하고 농촌에 있는 로모를 모셔야 하였기에 부득이 고향으로 돌아와 향수촌에서 당지부서기로 일했다. 향수촌에는  이들 삼형제 외에도 출세한 사람들이 일부 있다. 하지만 함씨네 집안 삼형제의 지명도가 가장 높다.

소학교시절에 함씨네 집안의 막내인 관국은 우리 또래들을 집에 불러다 놓고 형들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군관모자에 군복을 입고 허리에 권총을 찬 관국의 두 형님, 참으로 멋졌다. 우리는 관국형이 부럽기 짝이 없었다. 


함씨네 삼형제(좌로부터 함관흥 류충록 함관국)


향수촌 사람들은 군대에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마을사람들은 군인을 숭배하기까지 했다. 군대들 덕분에 자신들이 운명을 바꿀 수 있었고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리라. 따라서 마을사람들은 군대로 가는 사람을 크게 출세한 사람으로 생각했다. 함씨네 삼형제 중 셋째인 함관국은 급별은 그리 높지 않았으나 우리는 그를 제일 높은 사람으로 우러러 보았다. 그는 우리 친구들 가운데서 유일하게 군관으로 승직한 사람으로서 늘 선망의 대상이 되였다. 그는 조선전쟁시기 중국인민지원군 총사령원인 팽덕회 장군으로부터 “만세군(万岁军)”으로 칭송을 받은 영웅부대 38군단 퇀장으로 근무하다가 건강상황이 여의치 않아 제대하여 보정시간부휴양소에서 휴양했다. 2008년 7월 20일, 그는 60세라는 아까운 나이에 뇌출혈로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어언 12년이란 세월이 흘러갔지만 그가 나에게 남긴 인상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다. 부리부리한 눈매, 활달한 성격, 호탕한 웃음소리, 어린 시절 우리를 데리고 공을 차고 물고기를 잡고 사냥하러 갔던 위풍당당한 모습, 군복무시절에 휴가를 맡아가지고 마을에 돌아오면 동네방네 다니며 로인들에게 문안을 드리고 일만 찾아하던 씩씩한 모습, 이제는 아득한 옛날의 이야기로 되였다. 하지만 나를 친동생처럼 아끼고 사랑해 주었던 관국형의 모습은 오늘도 새삼스럽게 내 가슴을 친다.

소년시절의 관국형-물고기 몇마리 더 넣어주다


어렸을 때 내가 살던 마을은 발해왕터에서 서북쪽으로 3킬로메터 가량 떨어진 향수촌이였다. 향수촌 본촌에서 남으로 약 1.5킬로메터 가면 10여 가구가 사는 동네가 있었는데 웃(윗)향수라고 불렀다. 관국형도 웃향수 태생이다. 그 때 웃향수에는 우리 또래가 네댓 명 있었다. 모두 한두 살, 기껏해야 두세 살 차이였다. 일용, 창남, 나와  관국형, 그리고 복순이와 복음이라는 녀자애도 있었다. 관국형은 나보다 세 살 더 먹었고 일용이, 창남이보다는 두 살 더 먹었다. 동년시절 관국형은 우리들의 대장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늘 우리를 데리고 놀았다. 

내가 7살되던 해 웃향수 사람들은 모두 본촌마을로 옮겨가게 되였다. 하지만 우리 웃향수에서 온 친구들은 학교를 가도 함께 가고 그 무슨 맛있는 음식이 생기면 서로 나누어 먹군 했다. 향수촌에서 강서촌에 있는 강서소학교로 가자면 와이어줄에 널을 깐 목단강다리를 건너야 했다. 나는 다리 건너기를 무척 무서워했다. 관국형은 내가 무서워하는 줄 알고 나이가 제일 어린 나의 손목을 잡고 소학교 3학년 때까지 학교에 데리고 가고 학교에서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참으로 친형님처럼 나를 보살펴준 것이다. 

1950년대 후반 관국형의 맏형과 둘째형은 벌써 중위급 군관으로 되였는지라 일년에 한번씩 휴가차로 집에 오게 될 때면 귀한 사탕과 과자를 사서 트렁크에 넣어가지고 들고 왔다. 그때마다 관국형의 어머니는 늘 우리에게도 나누어 주었다. 그 덕분에 우리는 해마다 사탕, 과자를 한번 쯤은 맞볼수 있었다. 또한 관국형에게는 축구공과 놀이감 권총도 있었는데 그건 모두 군관으로 있는 형들이 사온 것이였다. 관국형은 평소에 바깥에서 놀 때면 축구공과 놀이감 권총을 제일 어린 나에게 맡겨 보관하게 하였다. 물론 나는 내 목숨처럼 축구공과 놀이감 권총을 지켰다. 

그때 우리 향수촌 애들은 건너마을 강서촌 애들과 자주 축구시합을 했는데 번마다 내가 축구공을 그물에 넣어가지고 메고 다녔다. 헝겊공이나 돼지오줌개로 만든 공을 차던 우리에게 가죽으로 만든 진짜 축구공이 생겼으니 그건 대단한 자산이였다. 내 또래 친구들은 나를 몹시 부러워했다. 관국형은 일단 일을 맡기면 종래로 군소리를 할 줄 모르는 성격이여서 축구공에 대한 권력은 전적으로 나에게 있었다. 

관국형은 어려서부터 기발한 궁리를 많이 했다. 겨울에 새하얗게 눈이 내리면 콩알에 바늘귀만한 구멍을 내고 그 안에 약(싸이나)을 넣고 봉했다. 그리고 논밭과 들판으로 다니며 콩알을 뿌려 놓았는데 산에서 내려온 꿩들이 그걸 주어먹고 뒤뚱거리다가 쓰러져 죽었다. 어찌 이뿐이랴. 참새를 잡기 위해 새덫 20여개를 만들어가지고 논밭에 놓기도 했고 여우나 오소리를 잡기 위해 그놈들이 다니는 길목에 곰덫을 놓기도 했다. 겨울방학이 되면 나는 관국형을 따라 눈길을 헤치며 다녀야 했다. 하지만 여우나 오소리는 더 말할 것도 없고 꿩도 별로 잡는 걸 보지 못했다. 물론 덫에 끼인 참새를 잡은 일은 몇 번 있었다.

그리고 밤중에 처마밑에 있는 새둥지를 털기도 했고 새총으로 참새를 쏘아서 잡은 일은 몇 번 있었다. 아무튼 사냥길에 나선 우리는 흰눈이 무릎을 치는 길을 헤쳐가야 했다. 그래서 나는 형님들이 일할 때 싣는 고무장화나 솜신을 신고 다녀야 했는데 눈이 들어가 신이 축축히 젖으면 형님들에게서 꽤나 지청구를 들어야 했다. 사실 나도 관국형을 따라다니는 일이 그렇게 좋은 일만은 아니였다. 하지만 평소에 받은 사랑에 조금이라도 보답하자면 군소리 없이 따라 다녀야 했다. 하여튼 겨울방학이 되면 관국형은 거의 날마다 나를 데리고 사냥을 다녔다. 

그때 우리는 오전에는 공부하고 오후에는 2시간만 공부를 했다. 집으로 돌아오면 대체로 유희를 하거나 공을 찼다. 가을철이 되면 우리들의 행사는 더더욱 복잡해졌다. 우선 집에 와서 밤낚시 준비로 지렁이를 파거나 모기쑥을 준비해야 했다. 밤낚시를 할 때는 마른 쑥타래에 불을 붙혀놓고 모기를 물리치면서 새벽 1시 좌우까지 보뚝에 앉아 있어야 했다. 그때 팔뚝같은 메기 20마리 정도는 쉽게 낚을 수 있었다. 가을철 고기잡이에서 제일 성수나는 것은 도랑이나 논밭에 고기를 잡는 통발을 여러 개 놓고 통발에 내려온 붕어며 메기를 주어 다래끼에 담는 일이였다. 관국형은 고기통발을 놓을 때가 되면 또 나를 데리고 다녔다. 우리 마을 논밭은 봇물을 대는데 통발은 보통 제일 아래 쪽에 있는 논밭에 있는 논코에 놓았다. 그러면 10여 개 논밭의 고기들이 물이 잦아들면 자연 통발에 내리게 된다. 관국형은 보통 일여덟 개 논코에 통발을 놓았다. 그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통발이 제대로 놓였는가 살폈다. 별로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면 아예 모든 통발을 나에게 맡기고 어디론가 가버렸다. 

관국형은 때로는 다른 친구들과 합작하여 봇물을 막고 고기를 잡아내기도 했다. 물론 통발을 지키는 일은 내 몫이였다. 나는 그가 없어도 다래끼를 메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통발에 내린 고기들을 번개같이 주어 다래끼에 담았다. 어떤 때는 고기가 너무 많이 내려 다래끼에 고기가 꽉 차서 내 힘으로는 도무지 들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논뚝 옆에 서있는 나무가지를 꺾어 다래끼 끈을 단단히 매놓았고 다른 다래끼를 메고 고기발들을 하나하나 점검했다. 

해가 서산에 질 무렵에야 관국형이 나타난다. 그는 우선 두 다래끼를 마주세우고 물고기를 똑같이 나누어 놓고는 나더러 어느 다래끼를 가지겠느냐 하고 묻는다. 내가 아무 것이나요, 하고 다래끼 하나를 가리키면 관국형은 자기 다래끼에서 어른의 손바닥만한 붕어와 메기 서너마리를 꺼내서 나의 다래끼에 더 넣어주었다.

“통발을 지키느라고 고생을 했으니 네가 더 가지는 게 당연하다. 날이 어두워지니까 빨리 가자꾸나!” 

내가 더 가져야 할 리유가 없다고 하면 우격다짐으로 고기가 많이 들어있는 다래끼를 나에게 넘겨주었다. 어린 시절에도 관국형은 친구를 배려할 줄 알았고 고기 한마리라도 친구에게 더 주려고 하였다. 이처럼 그는 친구들과 함께 다녔지만 언제나 친구를 배려하는 립장에 서있었다. 일이야 누가 했던지, 남보다 더 가지려는 욕심은 꼬물만치도 없었다. 아마도 어린 시절의 통솔력과 욕심없는 그의 깨끗한 마음은 그가 커서 군관으로, 훌륭한 인물로 성장할 수 있는 바탕이 된 것 같다. 

그날 고기를 나누던 일, 내 다래끼에 고기 몇마리 더 넣어주던 그 모습이 오늘도 내 눈앞에 화면처럼 떠오른다.

영웅부대의 나젊은 군관- 오보호 할머니들 댁에 물을 길어주다


관국형은 초중을 졸업하고 농촌에서 일했다. 그는 마을의 축구선수로 공사의 축구대회에 나가 크게 이름을 날렸고 농촌구락부의 문예활동에도 적극 참가해 장끼를 보였다. 그래서 마을에서는 칭찬이 자자했다. 마을의 축구팀에서 관국형은 문지기로 나섰는데 번쩍 공중으로 날면서 들어오는 공을 받아쥐기도 하고 공을 몰고 쏜살같이 들어오는 상대방 공격수를 요리저리 막으면서 날래게 공을 잡아채기도 했다. 그때 마을사람들은 관국형을 두고 축구를 해도 크게 성공할 젊은이라고 입을 모았다. 

1965년 12월, 관국형은 참군하여 영웅부대인 38군단 통신련대(连队)에서 무전수로 있었다. 그는 가끔 나에게 한어로 쓴 편지를 보내왔다. 애초에 나는 겨우 편지내용을 뜯어보았는데 그런 편지를 여러번 받아보는 가운데 내  한어수준이 훨씬 제고된 듯 싶었다. 그때 우리는 관국형이 무전수가 된 것을 대단히 출세한 것으로 알았다. 특히 항미원조전쟁을 다룬 영화 《영웅적인 아들딸》에 전투영웅 왕성이라는 무전수가 나오는데 우리는 관국형을 이 영화의 주인공에 견주어보기도 했다. 


함관국 리련화 부부 약혼사진

특히 그는 군사훈련과 정치학습에서 뛰여난 성과를 거두었기에 전군 모택동사상학습 열성분자로 되였고 국경검열식에 참가하여 모택동 주석의 검열을 받기도 했다. 지금 같으면 국경의장대 검열식을 텔레비죤을 통해 볼 수 있겠지만 그때는 편지를 통해 알게 되였다. 그러나 우리는 직접 본 것처럼 여기저기 자랑하면서 다녔다. 

1970년, 관국형은 군관으로 발탁되였는데 휴가를 맡아가지고 집에 오게 되였다. 우리 마을은 큰 경사가 난듯이 들끊었다. 일개 농사군이던 관국형이 당당한 군관으로 나타났으니 실로 장원급제를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휴가를 맡고 고향에 돌아와 며칠 있는 동안 관국형은 무척 바삐 돌아쳤다. 마을의 어른들이 계시는 댁을 찾아 일일이 방문했고 또 물지게를 가지고 목단강변에 가서 약수를 지고 와서 오보호 할머니들 댁에 드렸다. 때로는 농민들과 함께 벼탈곡을 하기도 했다. 아마도 농민의 아들이라는 본색을 잃지 않았다는 점을 알리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1970년대 초반, 관국형은 38군단 축구팀 선수 겸 코치가 되여 전국 군부대 운동대회에 여러번 참가하여 소문이 났다고 한다. 축구 선수, 코치로 전군에서 이름을 떨치던 중 어느 한차례 경기에서 불행하게도 무릎뼈가 부서지는 엄청난 부상을 입기도 했다. 그뒤 그는 부대에 다시 돌아와 련장으로 진급했다. 1975년 6월 당산대지진 때, 그는 부대의 명령을 받들고 당산에 가서 지진재해 구조전투에 참가했다. 련장인 그는 한개 무선전소대를 거느리고 재해지구에서 싸웠다. 상급 지휘 부대와의 정보련락회복, 무너진 집채에 깔린 사람들에 대한 구출, 그리고 비행장에서의 부상자수송 등에서 뛰여난 기여를 해서 1등공을 세웠다. 그는 북경에서 열린 표창대회에 참가하여 중앙의 주요 지도자들의 접견을 받는 영광을 지니기도 했다. 1976년 7월, 38군 정치부 190호 명령에는 관국형의 영웅사적이 아래와 같이 기입되여 있다.


실전훈련을 지휘하고 있는 함관국 상좌 

“당산 지진재해 구조 중에서 함관국 동지는 무선소대의 동지들을 이끌고 여러가지 곤난을 극복하고 통신련락을 신속히 회복하여 상급의 지시를 재때에 정확하게 전달하였다. 동지는 시종 무전기 옆에서 떠나지 않았으며 무전방송차 안에서 식사하고 잠을 잤다. 어느 하루, 자정이 되였는데 지휘소와의 련락이 끊어졌다. 이때 그는 신속하고 과단성있게 전체 무선전 소대 전사들을 이끌고 비를 무릅쓰고 쌍극천선을 늘여 신속히 지휘소와의 련락을 갖게 하였다. 또한 그는 무선사업 외의 시간과 휴식시간을 리용하여 계급형제들을 구출했다. 그는 중대동지들과 함께 무려 100명의 조난자들을 허물어진 집채 밑에서 구해냈다. 뿐만 아니라 휴식을 취하고 잠을 자야 하는 저녁때에도 주동적으로 비행장에 달려가 부상자들을 비행기에 실어날랐다. 하루 저녁에 500여명의 부상자를 비행기에 실어 그들을 구원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처럼 관국형은 백성의 생명을 구출하기 위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나섰을 뿐만아니라 뛰여난 총명과 지혜로 통신련락임무도 출중하게 완성하였다. 이러한 공헌이 인정되여 1등공을 받았고 통신영장으로 승진할 수 있었다. 그 뒤 그는 퇀장으로 승진한 후 38군단 후근부에서 근무하였다. 그는 1995년 부대에서 제대되여 보정시 간부휴양소에서 생활하였다. 

관국형의 마지막 부탁-사업을 첫 자리에 


1970년대 후반기, 나는 연변대학에서 공부하였고 졸업 후 중산대학에 가서 연수했다. 그 뒤 김일성종합대학에서 석사연구생과정, 연변대학에서 박사연구생과정을 밟았다. 학위공부를 마친 후에도 연변대학에서 여러가지 보직을 맡고 바삐 돌아치다 보니 관국형과 만날 기회가 좀처럼 생기지 않았다. 2003년 나는 연변대학의 주요 행정직무를 맡았고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로 당선되여 해마다 북경에서 열리는 전국인민대표대회에 참가했다. 꼬박 10년 동안 참가한 셈이다. 

2003년 3월, 나는 북경에 가서 전국인민대표대회의에 참가한다는 소식을 관국형에게 전화로 알려드렸다. 나의 전화를 받은 관국형은 아주 기뻐하였다. 이튿날 동부인해서 나를 보러 북경으로 오겠다고 했다. 나는 휴회 기간에 보정시에 있는 댁을 방문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아예 나의 말을 들어주지도 않았다. 

“자네가 대학교 교장이 되고 전인대 대표로 되였으니 이보다 더 큰 경사가 어디 있겠어? 내가 직접 찾아가서 축하하는 게 도리야. 거절하지 말게!”

나는 그의 뜻을 도저히 꺾을 수 없었다. 이튿날 그는 형수님과 함께 내가 묵고 있는 북경 금대호텔로 찾아왔다. 내가 저녁을 대접하겠다고 했더니 “그건 절대 안 돼!” 하고 딱 잡아뗐다.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관국형의 대접을 받는 수 밖에 없었다. 그날 우리는 많은 옛이야기를 나누었다. 

“홀로 살면서 자네를 키워준 어머니, 그리고 아버님처럼 자네를 보살펴준 자네의 큰형이 살아 계신다면 얼마나 기뻐하겠어? 난 자네가 전인대 대표가 되였다는 소식에 너무 기뻐서 어제 밤에 한 잠도 자지 못했다네.”훤칠한 몸매, 환한 얼굴에 마냥 웃음을 띄우고 있는 형수님 리련화 녀사도 연신 나를 칭찬했다. 형수님은 남편을 곱게 흘겨보면서 “이 량반의 성미가 불같아서 일단 간다 하면 생벽도 박차고 나가시니 뉜들 감히 막을 수 있겠어요? 무작정 오늘 북경 가서 축하해줘야 한다는 거에요.”하고 싱긋이 웃었다. 


관국형은 원래 “주성”이라 할만한 애주가인지라 그날도 술 한병을 혼자 굽을 내고 말았다. 그는 내가 교장이 되고 인민대표가 된 것을 아주 대견스러워 했다.

“대학교 교장은 대단한거야. 자네가 교장이 된 걸 향수촌 사람들이 알면 벌써 큰 잔치를 벌렸을거야. 내가 타고장에 있으니 망정이지 고향 현지에 있었다면 경축연은 내가 주최했을 거야? 전인대 대표는 아주 중요한 사명을 짊어지고 있어. 어진 백성의 의사를 회의에 잘 반영해야 할 게 아닌가!”

그 날 우리는 밤 10시까지 술상에서 얼굴을 마주하고 회포를 풀었다. 밤도 깊고 길도 멀고 하니 내가 호텔을 마련할테니 하루 밤 쉬고 래일 아침에 갈 것을 내가 극구 만류했으나 그는 나의 말을 듣지 않았다. 


 57년만의 상봉 (좌로부터 류충록, 류성재, 추세계)

2003년 3월, 30년 만에 상봉한 후 나는 해마다 전인대 회의에 참가하면 휴식일에 반드시 보정시로 찾아가 관국형을 찾았다. 관국형과 형수는 친동생을 만나기라도 한듯이 번마다 따님과 사위를 불러놓고 나를 환대했다. 주요한 화제거리는 고향마을의 재미나는 이야기가 아니면 어릴 때의 이야기들이였다. 이를테면 마봉갑 어른이 호랑이를 때려 잡은 이야기, 리민수 로인이 사과밭을 지키면서도 집체의 사과 한 개 맛보지 않은 이야기, 여름에 논밭에서 제초기를 밀다가 잠간 휴식하는 시간에 붕어회에 술잔을 나누던 이야기, 마을의 “똥돌이”라는 젊은이가 물도랑에서 뒹구는 20근 되는 잉어를 잡은 이야기…… 재미나는 이야기에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관국형은 군부대에서 수많은 위훈담을 남겼지만 자신의 이야기는 아예 입밖에 내지도 않았다. 남의 이야기는 구수하게 엮지만 유독 자기 이야기만은 하지 않았으니 사내대장부의 웅심을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는 유독 맏형되는 류충록 대좌의 이야기는 즐겨했다. 그는 맏형은 1946년 3월 14살에 참군하여 1946년 12월 녕안현 동경성 사란진 토비숙청전투에 참가했는데 그 전투에서 함께 싸웠던 전우 류성재(刘成斎,양자영이 속했던 련대 지도원)가 후에 38군단 부군단장으로 되였고 영(营)교도원으로 있던 추세계(邹世桂)는 제대되여 북경시 석탄공업계통에서 령도로 있었다고 했다. 류성재는 토비숙청에서 총탄을 8발이나 맞고 쓰러졌는데 박씨라는 조선족로인이 구해주었다고 했다. 세 분은  어렵게 련계가 되여 2003년 음력설야회에서 57년만에 기적적으로 상봉하게 되였다는 이야기만을 구수하게 엮었다. 그해 음력설야회에서 이루어진 세 로전우의 상봉을 CD로 만든것을 나에게 보이며 토비숙청전투 때의 전투장면을 흥미진진하게 이야기해 주기도 했다. 관국형은 맏형의 업적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했는데 그의 맏형 류충록 대좌는 해방전쟁, 항미원조, 동남연해에서의 대만과의 전투에 참가했다. 또한 1980년 초 미국에 가서 무인정찰기를 수입해 왔고 중국과 윁남전쟁 때는 무인정찰기를 지휘해서 뛰여난 공적을 쌓았다고 했다. 둘째형 함관흥도 1969년 3월 동존서부대 영장으로 있을 떄 포병영을 거느리고 진보도전쟁에 참가하여 전투를 지휘했다.

그의 맏형 류충록 대좌는 정년 후 연변에 와서 경제고문을 맡은적이 있었다. 그는 내가 교장이 되였다는 소식을 듣고 나에게 축하편지를 보내왔는데 다음과 같은 사연도 전해주었다. 

“내가 철없는 14살에 참군하면서 향수촌을 떠났지. 그때 자네의 큰어머니가 따님을 시집보내고 건강이 여의치 않아 자네 집에 와서 함께 지냈어. 내가 떠날 때 자네의 큰어머니가 마을어구까지 나와서 동전 50전을 나에게 준적이 있었어. 그 동전 50전을 가방에 넣고 소중하게 간직했거든. 그런데 1951년 5월 제5전역 때 소양강을 건너라는 긴급 명령이 내려와서 다그쳐 강을 건느던 중 그 소중한 동전을 넣은 군용가방을 잊어버렸단 말일세. 지금도 생각하면 참 아쉬운 일이지. 아무튼 나는 자네의 큰어머니를 영원히 있을 수 없어.”


류충록 리인옥 부부

류충록 대좌의 부인 리인옥 녀사는 1984년 일본 주재 중국도서수출입회사 해외도서 업무담당으로 일했다. 연변대학을 평생 성심성의로 후원해준 동경대학 객원교수 동훈 선생의 주선으로 한국 대우재단에서 연변대학에 1만여권의 한국학술도서를 기증할 때 리인옥 녀사는 중국도서수출입회사에서 받는 것으로 수속해 주었다. 그 덕분에 1만여권의 도서를 차질없이 받게 되였으니 우리 연변대학으로 놓고 말하면 리인옥 녀사는 참으로 고마운 분이요, 대학의 력사에 대서특필해야 할 중대한 일이다. 나는 교장이 된 후 그 일이 너무 고마워 류충록 대좌의 댁을 방문한적이 있다. 그 무렵 류충록 대좌는 리직후 과외화가로 그림을 그리고 리인옥 녀사는 남편을 내조하면서 두 분이 조용히 만년을 보내고 있었다. 내가 도서지원을 협조해주셔서 아주 고맙다고 인사를 드리니 리인옥 녀사는 “당연히 민족대학을 후원해야 하지 않겠어요” 하고 겸허하게 말씀하는 것이였다. 

2005년 여름, 나도 관국형과 형수를 연변에 초청하여 백두산에 오르고 훈춘의 방천 등지를 답사하면서 즐겁게 보냈다. 관국형과 함께 참군한 우리마을의 정민돌형도 연길에 와서 생활하고 있었기에 그와 그의 동서인 연변대학 과학연구처 처장 김청송 교수도 열정적으로 나서서 대접했다. 그래서 관국형 내외는 연변에서 며칠동안 즐겁게 보낼 수 있었다. 

2007년 5월, 학교의 일로 북경에 출장갔을 떄 일이다. 관국형은 반드시 일요일에 보정으로 오라고 했다. 이번에는 백양전(白洋淀) 유람지 관광을 하기로 했으니 연변대학 북경사무처 왕주임도 동행하라고 했다. 

나와 왕주임은 아침차로 떠나 하북성 보정시에서 45킬로메터 떨어진 백양전에 도착하였다. 때는 10시인데 관국형네 내외, 따님과 사위 그리고 군인으로 있는 관국형의 동서인 무장경찰검사소 소장 목선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관국형은 우리를 보고 백양전에서 관광을 두어 시간 쯤 하고 12시부터 식사하자고 하면서 식당은 이미 예약이 되였노라고 했다. 

백양전은 하북성 경내의 유일한 담수호로서 보정시와 창주시의 교차점에 있었다. 143개의 크고 작은 담수호가 련결되여 있는데 총면적은 366평방키로메터, 년 평균 저수량은 13억2천만 립방메터이다. 영정하(永定河)와 거타하(澽沱河)의 거센 흐름으로 이루어진 움푹한 곳으로서 북과 서, 그리고 남으로부터 폭하(瀑河), 당하(唐河), 조하(漕河), 주하(瀦河) 등 아홉 갈래의 강이 흘러 들어와서 큰 호수로 되였다고 한다. 호수물은 동쪽에 있는 사홍갑(泄洪闸)과 익류안(溢流堰)을 통과한 뒤 조룡하(赵龙河)를 거쳐 대청하(大清河)로 흘러들었다. 옛날부터 백양전은 보정과 천진 사이의 주요한 항로이며 어업과 갈대산업으로 유명하다. 특히 항일전쟁시기 이 지역 인민들은 백양전에서 일제와 지혜롭게 싸워 혁혁한 전공을 쌓기도 했다. 

저명한 작가 손리(孙犁)는 《백양전기사》(白洋淀纪事)라는 문학작품집을 발표했는데 소설, 산문 등을 통하여 백양전 인민들의 드높은 항일투쟁정신과 지혜롭고 아름다운 생활지향을 잘 반영하였다. 소설 《련꽃늪》(荷花淀)은 항일전쟁시기에 발표한 소설로 수생 부부의 투쟁정신과 슬기로움을 핍진하게 그려낸 명작이다.     

일망무제한 백양전을 바라보면 여기저기 련꽃들이 붉게 피여나 수면을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다. 또한 여기저기에 무성하게 자란 갈대숲이 한눈에 안겨오는데 마치 호수의 숨은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관국형의 안내하에 우리는 유람선을 타고 갈대숲을 헤쳐가면서 당년의 백양전 인민들이 갈대숲을 리용해 일본군에 호된 타격을 준 장면들을 되새겨보기도 했다. 호수의 중심에서 40분 남짓이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을 때 나는 길림성발전개혁위원회 조주임이 보내온 급한 전화를 받게 되였다. 오후 2시에 국가발전개혁위원회 강주임이 우리를 접견하기로 했으니 국가발전개혁위원회 정문앞에서 만나서 함께 접견실로 가자고 했다. 

국가발전개혁위원회 강주임을 직접 만나는 것은 나에게는 특대 중요한 일이였다. 학교에서는 새로운 캠퍼스확장공사와 관련하여 국가발전개혁위원회에 6천만원의 건설자금을 신청하였는데 이 문제에 대하여 국가계획발전위원회에서는 직접 학교측의 상세한 설명을 들어보자는 것이였다. 전화를 받은 나는 아주 난감하였다. 오후 제시간에 국가발전개혁위원회 정문에 도착하자면 반드시 당장 백양전을 떠나야 했다. 그런데 관국형은 이미 점심식사장소까지 예약한 상황이 아닌가? 그렇다고 접견을 뒤로 미루어달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캠퍼스확장공사에 필요한 자금을 얻을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가 아닌가? 나는 잠간 고민 끝에 관국형에게 여쭈어보았다. 관국형은 생각밖으로 단호한 결정을 내렸다.

“당장 북경으로 돌아가게! 관광은 후에 할 수도 있고 식사도 오늘만 할 게 아니지 않는가? 학교의 중요한 사안을 처리해야지, 령도간부는 직장사업을 첫 자리에 놓아야 하네.” 

관국형은 그야말로 백전로장답게 단호하게 결정했다. 우리는 아쉬움을 남기고 백양전을 떠나 북경으로 돌아가는 차에 앉았다. 북경에 돌아가자 모든 일은 순조롭게 풀려 우리 학교는 국가로부터 건설자금을 지원받아 건평 3만평방메터 되는 과학기술도서관을 신축하기도 했다. 그런데 나와 관국형의 만남이 유감스럽게도 그번 만남으로 영영 끝나게 될 줄이야 어찌 알았으랴!

2008년 3월 2일, 전인대 회의차로 북경에 갔을 때 관국형은 전화로 북경에서 만나자고 했다. 내가 기어코 보정시로 찾아가겠다고 하니 이번은 자신이 북경에 갈 차례라고 했다. 그런데 이튿날 나는 형수로부터 관국형이 뇌출혈로 병원에 입원했다는 급보를 받았다. 내가 급히 왕주임과 함께 보정시중심병원으로 달려갔을 때 관국형은 이미 의식을 잃고 구급실에 누워있었으며 우리를 알아보지 못했다. 병원측에서는 최고의 의료진을 동원해 치료대책을 강구했으나 효과를 보지 못했다. 그해 7월 20일 관국형은 이 세상을 영원히 떠나갔다. 나는 학교에 급한 일이 있어 유감스럽게도 관국형의 유체고별식에 참가하지 못했다. 형수님이 알려준 소식에 의하면 38군단 간부료양소 간부들과 전우들, 그리고 사회 각계의 수많은 인사들이 관국형의 유체고별식에 참석하여 명복을 빌었다고 했다. 

관국형을 하늘나라에 보낸지도 어언간 12년이 된다. 그 사이 관국형이 념려했던 막내따님 성란이도 동북사범대학을 졸업하고 박사학위까지 취득했고 지금은 하북경제무역대학교 교사로 근무하고 있다. 성란씨가 대학공부할 때 얼마간 도움을 줌으로써 관국형의 근심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린 것 같아 기쁘다. 



함관국 리련화 부부 

인생은 한번 가면 다시 오지 못하는 게 아쉽다. 유명을 달리 함은 자연의 법칙이니 순리로 달갑게 받아들이는 게 현명한 선택일 것이다. 명절이 되거나 휴식일이 오면 나는 지나온 세월을 회고할 때가 많다. 그때마다 나는 관국형을 그린다. 호방하고 단호하고 너그럽고 다정하던 그 사내대장부의 모습을! 그 얼굴, 그 목소리가 이 시각에도 눈에 삼삼, 귀에 쟁쟁하다.

“령도간부는 직장사업을 첫 자리에 놓아야 하네.”

관국형이 나에게 들려준 이 마지막 말씀은 오늘도 내 귀전에 메아리친다. 친형님처럼 나를 보살펴주었던 관국형의 명복을 다시 한번 빈다!


▣(출처:《중국민족》조선문판  글/김병민  편집/리호남  조판/ 한동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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