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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철국 장편스포츠실화] 챔피언 1965 (3) 결심

조글로 潮歌网 2020-09-15

토일련재


 신철국  장편스포츠실화 

                  -1965년 길림성축구팀 전국축구 갑급팀련맹경기 우승 실록


연변인민출판사



결심


1905년 엄동설한에 박만복의 증조부는 일가식솔을 거느리고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에 발을 들여놓았다. 일가친척 하나 없는 땅이라 식구들을 거느리고 왕청의 배초구며 하마탕을 전전했다.


그러다가 나중에 하마탕 일툰 1) 에 정착해 어려운 나날을 보냈다.

1) 후에 영안촌으로 개명.


박만복은 1935년 11월 4일에 영안촌의 한 오막살이집에서 7남매중 넷째로 태여났다. 도박에 깊이 물들어있던 아버지는 그날도 어디론가 사라진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어머니는 돌보는 사람 없이 힘겹게 해산했다. 뒤늦게야 여덟살 난 누이가 아버지를 찾아 어머니의 해산소식을 알렸지만 내처 도박판에 빠져있던 아버지는 아들이라는 소리에 흐뭇해할뿐 좀처럼 일어날념을 하지 않았다. 때아닌 갓난아기의 울음소리에 긴가민가하며 왔던 앞집 할머니가 거미줄만 쳐진 쌀독을 들여다보고는 혀를 끌끌 차며 밖으로 나갔다. 잠시후 돌아온 할머니의 손에는 이밥과 미역국을 담은 그릇이 들려있었다…


그렇듯 째지게 가난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난 박만복은 보리밥,감자밥도 배불리 먹지 못했지만 무럭무럭 잘 자랐다. 맑디맑은 샘물이 퐁퐁 솟구쳐 조잘조잘 내물을 이루던 마을뒤 시내가, 봄이면 진달래꽃 꺾고 가을이면 산머루 따면서 맨발로 자갈길을 뛰여다녀도 마냥 즐겁기만 했던 동년…


여덟살 나던 해 만복이는 일제 노예교육을 받는 소학교에 입학했다. 일단 등교만 하면 하학할 때까지 절대로 우리 말을 해서는 안되는 그런 식민지교육이였다. 만약 조선말을 한것이 발각되기라도 하면 영낙없이 회초리맛을 봐야 했고 덤으로 화장실청소까지 해야만 했다. 그때 그의 집 형편에서는 일일이 책보를 갖춰줄수 없다보니 만복이는 자기 책을 형님의 책보에 한데 넣어가지고가서는 교문앞에서 꺼내가지고 교실에 들어가군 하였다. 어느 하루는 월사금 10전을 내지 못하여 수업중에 쫓겨난 일까지 있었다.


그렇게 어려운 형편에서도 공부를 잘해야 하겠다는 생각만은 만복이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다행히 1945년에 광복을 맞아 일제의 통치에서 벗어나게 되고 1946년부터는 조선족소학교에 다닐수가 있었다. 학교는 만복이네 마을 영안(永安)과 뒤마을 복안(福安)의 지명을 따서 “복영(福永)소학교”라고 불렀는데 학생만 해도 저그만치 70~80명이 되였다. 공부에 맛을 들여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던 만복이는 4학년 때 월반을 했고 또 5학년을 좀 다니다 다시 월반을 하여 6학년에 다니는 형님과 한학급이 되였다. 그렇게 소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입학시험을 보게 되였는데 희한하게도 형님과 만복이가 모두 합격되는 겹경사를 맞았다. 마을에 학교가 생겨서 처음이였다. 덕분에 만복이는 난생처음 기차를 타고 형님과 함께 현소재지에 자리 잡은 왕청중학교로 공부하러 가게 되였다. 코밑에 검댕이가 들어붙는 광솔불밑에서, 자칫하면 머리카락이 그슬리는 등잔불밑에서 잔뜩 두눈을 쪼프리며 공부하다가 환한 전등불밑에서 공부를 하니 그야말로 하늘에라도 오른 기분이였다.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였다. 어려운 가정형편때문에 형님과 함께 민간사립학교인 흥당련합중학교 1) 로 전학하는수 밖에 없었다.


1) 흥당련합중학(兴塘联合中学), 지금의 왕청현 대흥구중학교의 전신. 당시 “대흥구(大兴沟)”와 “하마탕(蛤蚂塘)” 두 지역이 공동으로 설립한 중학교라는 의미로 두 지명에서 각각 한 글자씩 취해 학교이름을 지었음.


만복이의 축구는 흥당련합중학교시절부터 시작되였다. 2학년때 동북국축구대표팀의 대표선수로 활약했던 체육교원 신병권선생의 눈에 들어 전 주 중학생축구대회에도 참가하면서 어느 정도명성을 쌓아가던 박만복은 1951년 7월, 고중진학시험을 보고저 룡정으로 가게 되였다. 그무렵 전 연변에 고중은 한곳 밖에 없었는데 그것이 바로 룡정에 있던 연변고중이였다. 정작 학교에 이르러 보니 모집하는 학생은 고작 300명뿐인데 응시생은 2천명도 넘었다. 거기에 함께 따라온 친구에 친척들까지 말 그대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시험은 필답시험과 면접시험 두가지였다. 첫날 필답시험을 그런대로 무난히 치른 박만복은 이튿날 면접시험을 보러 들어갔다.


40대 중반의 면접관이 엄숙한 표정으로 그를 맞이했다. 어딘가 면목이 있어보였으나 어디서 보았던지 기억이 어렴풋했다.


면접관이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박만복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애 써 눅잦히며 왕청현 흥당련합중학교에서 왔노라고 침착하게 대답했다.

“흥당련합중학교라?”

면접관이 중얼거리는가싶더니 “그럼 신병권선생한테서 축구를 배운적이 있었는가?”고 물었다.

졸업을 앞두고 체육교원 신병권선생의 인솔하에 전 주 중학생운동대회에 참가했던 박만복의 뇌리에 번쩍하고 불이 들어왔다.

(아, 바로 그 심판이 아닌가!)

그랬다. 그의 눈앞에 앉아있는 그 사람은 다름아닌 그번 전 주중학생운동대회에서 축구시합의 총심판을 담당했던 중국조선족축구계의 거목 채송철 1) 선생이였던것이다. 그무렵 채송철선생은 연변고중의 체육교원이였는데 박만복의 축구계몽스승인 신병권 선생과는 일찍부터 축구를 인연으로 잘 알고있는 사이였다.


1) 1922-1998년, 연변대학 체육학부 제1임 주임, 중국 제1대 국가급축구심판원. 연변의

각항 체육운동의 보급, 발전, 제고에 특출한 공훈을 세운 중국조선족 유명체육인.


그때까지 엄숙한 표정으로 박만복을 대하던 채송철선생의 얼굴이 부드럽게 펴졌다. 물론 박만복의 면접시험도 무난히 통과되였다. 8대1이라는 높은 문턱의 입학률을 뚫고 진실한 성적으로 연변고중에 진학한것이다. 개천에서 룡이 났다고 고향마을뿐만아니라 린근마을들까지 들썽했다.


어릴적부터 의사가 꿈이였던 박만복의 리상이 현실의 대안으로 다가가는 순간이였다. 약 한첩 쓰지 못하고 돌아가신 어머니,리질에 걸려 20일만에 세상 뜨신 할아버지, 병원 문앞에도 못 가보고 요절한 녀동생… 이런 아픈 기억들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꼭 의사가 되여 병마의 시달림을 받는 환자들을 치료해주는것이 꿈이였던 박만복이였다.


흥당련합중학교시절부터 축구에 심취됐던 박만복이 체계적으로 축구를 배우기는 연변고중에 진학해서부터였다. 고중에 진학한 박만복은 채송철선생으로부터 축구운동을 권장받았고 박만복도 전부터 해오던 운동이라 즐겨 배웠다. 그의 축구기술도 일취월장했다. 하지만 축구는 어디까지나 과외취미로 치부했다. 박만복은 그만큼 학업에 정력을 쏟으면서 의과대학 학생으로 되는 꿈을 향해 달리고있던터였다.


“선생님, 전…”

국가청년팀 선수자격을 고사(固辞)할 생각으로 찾아간 박만복한테 채송철선생이 이렇게 말했다.

“너 무슨 생각을 하고있는지 잘 알고있다. 하지만 만복아, 이 기회를 놓치지 말거라. 넌 응당 가야 한다.”

“그래도 전 의과대학으로…”


“물론 의사가 되는것도 중요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병이란 몸이 건강하지 못해서 생기는게 아니더냐. 꿈을 실현하는데는 건강이야말로 기초이고 기둥이라고 했거늘.”

“그럼…”

“이번 기회를 놓치지 말아라. 대처를 쭉 돌면서 시야도 틔워보는거다. 좋은 의서를 구입해 틈틈이 의학공부도 하면서 말이다. 어때?”

“……”

스승의 자애로운 눈길에 만복이는 말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전국 11개 도시 청년축구운동대회에서 준우승을 따내고 기념촬영을 하고있는 연변청년팀.


건강, 그렇다. 건강한 육체가 있다면 병은 찾아오지 않을것이다. 병이 없는데 의사가 무슨 소용이 있을텐가. 그렇다면 그 건강의 보증수표는? 운동, 바로 그것이다!

(한번… 해봐? 그래, 어디 한번 해보자!)

그해 8월 중순, 만복이는 청운의 꿈을 안고 연변청년축구팀의 4명 동료와 함께 중앙체육훈련반으로 향했다.(계속)


[신철국 장편스포츠실화] 챔피언 1965 (1)

[신철국 장편스포츠실화] 챔피언 1965 (2)


신철국

작가

【신철국 작가 프로필】

1971년 왕청현 하마탕향 전하촌(汪清县蛤蚂塘乡前河村)출생

연변대학 조선언어문학학부 졸업


연변민족문학원(제1기/1994년), 로신문학원(제30기중청년고급연구토론반·아동문학/2016년) 수료.


‹중국조선족백년실록›집필위원회 위원(스포츠) 력임.


연변텔레비죤방송국 청소년부, '흑룡강신문','길림신문'에서 다편간 편집, 기자로 활약. 연변작가협회 회원.


1986년 아동소설 '신방주인'으로 등단.


'화신문학상','압록강문학상','흑토문학상','연변라지오문학상','상익컵 실화문학상' 등 수상경력 다수. 


단행본 장편스포츠실화 ‹챔피언 1965› 출간.


공저로 ‹60주년에 만난 60인›, ‹중국조선족백년실록›, ‹연변축구의 발자취를 찾아서› 등이 있음.


현재 명동문화예술원 부원장 겸 글짓기지도로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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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작가
칼럼우상렬허명철박광성강효삼리성일장동일박광해최학송박승권김혁현춘산채영춘주소란|박광성|예동근|김범송김경애김문일김광림리동렬김정룡문학궁금이렴광호리해란서가인신철국최화길손룡호허강일이문혁김학철김혁림원춘허미란박장길렴광호김재현김수영김두필김일량남영전현춘산서가인리문호리광인김혁한석윤|허미란김학송김호웅남룡해김정권김영분림운호장학규리련화한영철김경진김영택김병민김복순최상운회령채영춘김명숙류영자김춘실류재순려순희김홍남윤청남리동춘심명주최화김명순[허강일 추리소설] 도시는 알고있다12[허강일 추리소설] 흉수는 바로 그놈이였다력사[구술] 김학철(4)[珍藏版]리광인 '70년대 사람들'|[구술] 남영전(1) (2) (3) (4) (5) (6) 양림(구술)채영춘(10) 리광인 실화문학《아,나의 중학시절이여》(구술)림원춘(7) |특집[珍藏版] 우리말 어원 산책(렴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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