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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철국 장편스포츠실화] 챔피언 1965 (4) 출국/류학

조글로 潮歌网 2020-09-15

토일련재


 신철국  장편스포츠실화 

                  -1965년 길림성축구팀 전국축구 갑급팀련맹경기 우승 실록


연변인민출판사


출국


천진시 중경도 100번지(天津市重庆道100号), 중앙체육훈련반 1) .

1) 지금의 북경체육학원 전신.


연변에서 같이 떠난 김인걸, 김창길, 최증석, 최호균 등 동료들과 함께 교문옆에 걸린 간판을 한참이나 응시하던 박만복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로부터 약 8개월간 박만복은 그곳에서 축구기본공과 신체단련 외에 해외출장전문가로부터 류학생들이 꼭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지식들을 익히는데 온갖 땀동이를 쏟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힘든것이 외국어공부였다. 훈련반에서는 할빈외국어전과학교로부터 우수졸업생 두명을 특채해 훈련반 학원들한테 로씨야어를가르치도록 했다. 그중 한 사람은 후날 중국체육운동위원회 축구사무실 주임 겸 중국축구협회 부주석으로 활약한 양수무 1) 였고 다른 한 사람은 로선오(卢先吾)였다.


1) 양수무(杨秀武, 1933-2007년).


1954년 4월, 박만복은 드디여 모든 학습을 원만히 마치고 중국청년대표팀(제1진 도합 14명)의 일원으로 국내축구사상 처음으로 되는 국가주도의 축구류학길에 오르게 되였다. 류학목적지는 다름아닌 오스트리아의 저명한 작곡가 요한 스트라우스의 명곡 “푸른 다뉴브강”으로 유명한 웽그리아 수도 부다뻬슈뜨였다.


하다면 왜 웽그리아였을가? 당시 중국과 웽그리아가 다같은 사회주의진영에 속해있던 형제국가였다는 점이 어느 정도 작용하긴 했지만 굳이 그 점을 강조한다면 응당 사회주의진영의 맏형이자 축구운동에서도 역시 중국보다 한발 앞선 쏘련을 찾아야 했을 것이였다. 하긴 당시의 국제정세로 본다면 틀린 생각도 아니였고 마찬가지로 중국체육운동위원회에서도 정하지는 않았지만 쏘련에로의 축구류학을 우선 념두에 두는 판이였다. 훈련반 학생들이 로씨야어를 배우도록 한것도 그런 연유에서였다. 하지만 최종 출국을 앞두고 웽그리아를 선택한데는 다른 원인이 있었다. 바로 웽그리아의 월등한 축구수준때문이였다. 당시 웽그리아의 축구수준은 쏘련을 훨씬 앞지르고있었고 세계축구의 정상에 당당히 올라 있었다.


웽그리아축구류학시절의 박만복.


이미 1952년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에서 있었던 하계올림픽에서 우승 탈취로 세계 축구강호들에게 새로운 축구왕조의 도래를 선언했던 웽그리아대표팀, 자세히 따져보면 그러한 웽그리아의 궐기는 결코 우연한것이 아니였다. 


이듬해인 1953년, 웽그리아는 현대축구의 종가로서 위세를 부리던 잉글랜드를 2차에 걸쳐 런던과 부다뻬슈뜨에서 각각 6대3과 7대1로 침몰시키며 세계를 경악케 했다. 특히 “영국축구의 성지”라 불리던 웸블리구장(温布利球场)에서 그때까지만 해도 90년 무패 전적을 자랑하던 잉글랜드를 6대3으로 격파했다는것은 실로 전설같은 대사건으로 기록되기도 했다. 그리고 웽그리아대표팀은 또 1954년, 스위스에서 개최된제5회 월드컵때 처음으로 출전한 신출내기 한국을 0대9로 대파한데 이어 그 전번 대회 우승과 준우승을 차지했던 우루과이와 브라질마저 각각 4대2로 무릎을 꿇렸던 “마법의 군단”이였다.


사실 이에 앞서 중국과 웽그리아는 진작 활발한 축구외교로 부쩍 가까운 사이이기도 했다.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된 이후 제일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한 외국축구팀이 바로 웽그리아대표팀이였다. 1954년 2월부터 3월까지 웽그리아대표팀은 중국 각지를 원정하면서 도합 11차의 친선경기를 치렀는데 총 득점수 대비가 57대4로서 중국팀이 매 껨당 다섯개 이상의 꼴을 먹은것이나 다름없었다.


당시 중국체육운동위원회 주임을 겸했던 하룡 부총리는 축구강국을 따라배워 중국축구의 락후한 현 상태를 하루속히 개변시키려고 작정하고있던터였다. 그 일환의 하나로 전국적인 범위내에서 축구유망주들을 선발해 축구강국에 류학을 보내는것이였다. 어찌 보면 그 전해에 상해에서 열린 전국 11개 도시 청년축구운동대회가 그러한 선발작업의 서막이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웽

그리아대표팀의 경기를 보고 자연히 마음이 동하지 않을수가 없었다. 웽그리아야말로 중국축구인들이 한시바삐 찾아가야 할 곳이였던것이다. 그래서 1954년, 중국체육운동위원회에서는 4월에 15명, 9월에 10명 이렇게 두번에 나누어 갓 선발한 25명의 축구유망주들을 웽그리아로 파견했다. 그들로는 년유사(年维泗), 장굉근(张宏根), 장준수(张俊秀), 진성달(陈成达), 방인추(方纫秋), 사홍균(谢鸿钧), 왕륙(王陆), 손보영(孙宝荣), 최증석(崔曾石), 성문관(成文宽), 증설린(曾雪麟), 왕금풍(王金丰), 박만복(朴万福), 왕극빈(王克斌), 총자여(丛者余), 손원운(孙元云), 장경천(张京天), 진산호(陈山虎), 장수호(张水浩), 진가량(陈家亮), 최호균(崔豪均), 김창길(金昌吉), 김인걸(金仁杰), 박증철(朴曾哲), 리원괴(李元魁)이다. 그들은 중국정부가 어마어마한 자금을 써가면서 외국에 내보낸 제1대 축구류학생들이기도 했다. 당시 이들은 웽그리아에서 약 1년 동안 류학생활을 했는데 그때 투입된 비용이 인민페로 만여원, 당시 국내 10여만명의 농민이 근 1년 동안 농사를 지은 소득과 맞먹는다는 후문이다.


하여튼 그중에는 최증석, 최호균, 김창길, 김인걸, 박만복, 장경천, 박증철 등 동북축구팀과 연변청년축구팀으로부터 선발된 중국조선족 축구유망주가 무려 7명이나 들어있어 전국을 들썽케 했다.

1954년 4월 1일, 축구류학생 제1진에 뽑힌 박만복은 다른 조선족동료들인 김창길, 김인걸, 최증석, 최호균 등과 함께 렬차에 앉아 만주리로 향했다. 그번 류학생대오에는 중국수영팀도 들어있었다. 전반 대오는 코치 가륜 1) 이 인솔하고 통역은 양수무가 맡았다. 이들은 만주리에서 다시 국제렬차를 갈아탄 뒤 쏘련을 거쳐 웽그리아의 수도 부다뻬슈뜨로 향했다.


1) 가륜(柯轮, 1924년-현재), 원 중국축구협회 비서장, 중국축구협회 부주석. 중국체육개척자영예상장, 중화인민공화국 체육사업공헌상 등 수차 수상.




류학


9일 뒤,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한이들은 이국의 신선한 풍경에 흥분된 심정을 걷잡을줄 몰랐다. 노랗고 고슬고슬한 양머리에 파란색의 눈동자를 가진 이국인들은 물론 눈에 보이는 모든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간이였다. 이들은 관광을 온것이 아니라 국가의 파견을 받고 학습하러 왔기때문이였다. 그것도 육체적인 대운동량을 필요로 하는 축구운동을 말이다.



웽그리아류학기간 이들의 일과는 매일 오전 두시간, 오후 두시간씩 집중훈련을 하는외에 또 한시간씩 웽그리아어를 배우는 것이였다. 출국하기전까지 줄곧 로씨야어를 배운이들한테 있어서 제일 큰 난제는 언어장애였다. 그래서 고안해낸 방법이 바로 로씨야어통역 양수무와 로선오(제2진 통역)더러 웽그리아어를 로씨야어로 번역한 뒤 다시 중국어로 번역하게 하고 또 중국어를 로씨야어로 번역하여 다시 웽그리아어로 번역하게 하는 이른바 “3국 3자통역”이였다. 그 당시로서는 유일한 대책이자 최선의 방법이였다.


이른바 비상시기의 특수한 조치였다.


이때 중국청년대표팀의 훈련을 책임진 사람이 바로 웽그리아대표팀의 조리지도로 활약하고있던 전 국가대표팀의 스타선수 안베르 웨피브(阿姆别尔ㆍ约瑟夫)였다. 그때 48세였던 그는 체중이 100여킬로그람에 달했다. 선수시절의 포지션은 중앙공격수였다.


안베르 웨피브는 웽그리아축구계의 절대적인 권위자였고 전반 유럽축구계에서도 하나같이 인정하는 축구명장이였다. 그래서인지 후날 중국류학생들이 축구류학을 왔다는 말을 듣고 “너희들을 가르치는 사람이 누구냐?”고 거만하게 묻던 사람들도 그의 이름만 대면 대뜸 엄지손가락을 내들고 “오케이!” 아니면 “유 노존유!”(웽그리아어로 매우 좋다, 잘한다는 뜻)를 련발하기가 일쑤였다. 그뒤 중국류학생들이 귀국할 때도 안베르 웨피브 지도는 이들을 따라 중국에 와 1년간 지도를 맡았으며 1957년 월드컵 예선때에도 중국팀을 성원하여 인도네시아까지 갔었다. 중국축구협회의 자료에 따르면 사실상 중국축구대표팀의 제2임 지도이자 제1임 외국인지도는 안베르 웨피브이다.


중국류학생들은 안베르 웨피브 지도를 만나면서부터 비로소 체계적으로 유럽의 선진적인 기술축구를 섭렵하고 배울수가 있었다.웽그리아에 금방 갔을 때 이들이 축구를 어느만큼 알고있는지 그 수준을 가늠케 하는 재미나는 일화가 있다.

웽그리아축구류학시절, 감독 안베르 웨피브(우 2)부부와 함께 있는 박만복(좌 1).


류학생들이 미래의 중국축구대표팀이라는 찬란한 이름으로 부다뻬슈뜨체육대학에 행장을 푼 다음날이였다. 중국정부의 초청에 의해 훈련을 책임진 안베르 웨피브 지도는 선수를 점고하다말고 아연실색한 표정을 지으며 전혀 리해할수가 없다는듯 도리머리를 저었다. 왜냐하면 제1진으로 도착한 선수가 고작 15명 밖에 안되였던 것이다. 하여 축구팀의 기본훈련인 대항시합조차 근본 조직할수 없는 형편이였다. 이 사정은 즉시 중국대표단 인솔자인 가륜에게 전해졌고 가륜은 인차 상급에 보고했다. 그래서 그해 9월, 제2진으로 10명 류학생이 급급히 투입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바로 그 10명중에 료녕성 심양시에서 온 장경천과 연변에서 온 박증철 두 조선족선수가 들어있었다. 류학기간 이들의 훈련캠프는 웽그리아올림픽쎈터에 마련됐다. 그곳에 도착해서 처음으로 있은 훈련시간에 안베르 웨피브는 각자의 축구기량을 료해하려는 타산에서 이들더러 볼트래핑(颠球)을 해보라고 했다. 선수들 거개가 몇개 못했다. 어느 류학생이 떨어뜨린 공이 주위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의 발치에 떨어졌다. 그때 한 웽그리아청년이 제꺽 그 공을 발끝으로 툭 차서 올리더니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신나게 톡톡 볼트래핑을 하는것이 아닌가. 그는 한동안 발로 공을 다루다가는 머리우로 차올려서 현란하게 헤딩을 해대더니 어느새 요술을 부리듯 100여개를 손쉽게 기록했다. 류학생들의 두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들은 그 청년이 틀림없이 대단한 축구선수일거라고 박수까지 쳐댔다. 그런데 후에 보니 그 청년은 웽그리아올림픽쎈터의 일

반 식당복무원이였다.


40여년이 지난 2000년, 한일월드컵을 대비한 중국대표팀 선수들이 밀로디세위치의 지휘아래 테니스그물을 걸어놓고 유희처럼 즐기던 “테니스축구” 역시 일찍 웽그리아에 류학 갔던 중국류학생들한테서 먼저 류행된것이였는데 그 선각자가 바로 안베르웨피브 지도였다. 이들은 그후 안베르 웨피브 지도의 지휘아래 독일, 체스꼬, 유고슬라비아 등 세계 각국을 주름잡으며 폭넓게 축구교류를 벌이면서 자신의 기량을 닦는데 온갖 정력을 몰부었다.


1955년말, 중국류학생들은 드디여 웽그리아에서의 축구류학을 마치고 조국의 부름에 따라 귀국했다. 원래 3년을 기한으로 잡고 오른 류학길이였는데 뜻밖에도 웽그리아의 국내 정세가 돌변하는 바람에 앞당겨 귀국하게 된것이다. 시골태생이라는 수수한 이름표를 달고 자신의 꿈을 설계하던 변강의 시골청년 박만복도 본격적으로 국가대표팀의 주력“전포”를 입고 당당히 그라운드에

나서게 되였다…


여기서 잠간, 그때 박만복과 함께 류학했던 조선족선수들의 인생행로를 돌아보기로 하자.


북경팀에 배속되였던 장경천(1935년 출생)은 부모가 모두 일찍 돌아가고 한분 밖에 없던 형님마저 조선에 나가다보니 고아나 다름없었다고 한다. 그는 심양시의 한 정미소에서 마대치기를 하면서 공부했다고 하는데 그후 심양체육학원에 입학하여 축구인생을 시작했다. 귀국후 줄곧 북경팀과 국가팀의 주력선수로 활약했던 그는 1965년에 퇴역, 그후 중국 국가2팀 지도로 활약했다. 현재 그는 북경에 거주하고있는데 투병중에 있다.


제1대 국가팀 대표선수로 활약했던 최증석(1932년 출생)은 원래 심양부대축구팀에서 주력으로 뛰다가 1951년, 중앙체육훈련반(중국국가팀)에 들어갔다. 그는 웽그리아류학기간 과외시간을 틈 타 열심히 웽그리아어를 공부하였는데 나중에는 아주 류창하게 구사할 정도였다고 한다. 1955년, 웽그리아대표팀이 중국에 방문경기를 왔을 때에도 전반 방문행사의 통역을 맡은 사람이 바

로 그였다. 퇴역후 북경시축구협회에서 사업한 그는 후날 중국국가대표팀의 지도로 활약한 고풍문(高丰文), 김지양(金志扬), 상서화(商瑞华) 그리고 중국녀자축구팀 지도 마원안(马元安), 축구행정지도자 왕준생(王俊生) 등을 발굴하고 키워낸 은사였고 지난 세기 60-70년대에 북경팀의 많은 선수들을 직접 발굴하고 가르친 백락이기도 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지난 2004년, 북경에서 있은 웽그리아류학 50돐 특별기념모임을 한달 가량 앞둔 8월 23일에 심장병으로 타계했다.


귀국후 천진팀에 배속되였던 김창길(1936년 출생)은 1958년에 조선에 나갔다. 그는 1964년까지 조선국가축구팀의 주장으로 활약하다가 퇴역한 뒤 체육성 축구관원으로 임직했다. 2004년 9월, 그는 연길에 있는 친척집에 와서 병치료를 하던중 중풍으로 돌아갔다. 사망 당시 리광수 1) 선생과 박만복이 직접 운명을 지켰고 영결식에도 참석했던것으로 알려졌다.


1) 중국조선족의 저명한 축구건장이며 이미 작고했음.


최호균(1936년 출생)은 웽그리아류학은 갔지만 비염과 치질로 인해 하루도 훈련을 하지 못하고 결국 그곳에서 수술을 받은 뒤 4개월만에 귀국했다고 한다. 그는 1954년말에 조선으로 나갔는데 풍문에 의하면 그뒤 조선 내무성축구팀에서 활약했다고 한다.


중국축구 웽그리아류학생팀 일원중의 조선족선수들(앞줄 좌로부터 박만복, 최증석. 뒤줄 좌로부터 장경천, 김창길).


김인걸 역시 류학기간 무릎상처때문에 별반 훈련을 하지 못하고 수술을 받은 뒤 먼저 귀국했다. 그는 길림성축구팀에 잠간 몸을 담그고있다가 조선으로 나갔으며 최호균과 함께 내무성축구팀에서 활약했다고 한다. 그는 오래전에 이미 사망한것으로 전해지고있는데 구체적인 년도는 알려지지 않고있다.


장경천과 함께 제2진으로 류학팀에 합류했던 박증철은 귀국한 뒤 국가팀에 얼마 안 있다가 조선으로 나갔다. 그 역시 내무성 축구팀에서 뛰다가 퇴역했다고 전해진다.

(계속)


[신철국 장편스포츠실화] 챔피언 1965 (1) 봉변

[신철국 장편스포츠실화] 챔피언 1965 (2) 기회의 신

[신철국 장편스포츠실화] 챔피언 1965 (3) 결심


신철국

작가

【신철국 작가 프로필】

1971년 왕청현 하마탕향 전하촌(汪清县蛤蚂塘乡前河村)출생

연변대학 조선언어문학학부 졸업


연변민족문학원(제1기/1994년), 로신문학원(제30기중청년고급연구토론반·아동문학/2016년) 수료.


‹중국조선족백년실록›집필위원회 위원(스포츠) 력임.


연변텔레비죤방송국 청소년부, '흑룡강신문','길림신문'에서 다편간 편집, 기자로 활약. 연변작가협회 회원.


1986년 아동소설 '신방주인'으로 등단.


'화신문학상','압록강문학상','흑토문학상','연변라지오문학상','상익컵 실화문학상' 등 수상경력 다수. 


단행본 장편스포츠실화 ‹챔피언 1965› 출간.


공저로 ‹60주년에 만난 60인›, ‹중국조선족백년실록›, ‹연변축구의 발자취를 찾아서› 등이 있음.


현재 명동문화예술원 부원장 겸 글짓기지도로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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