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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철국 장편스포츠실화] 챔피언 1965 (2)

조글로 潮歌网 2020-09-15

토일련재


 신철국  장편스포츠실화 

                  -1965년 길림성축구팀 전국축구 갑급팀련맹경기 우승 실록


연변인민출판사


기회의 신(神)


“따르릉—”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시오.”

“하하하… 잘 있었나? 나야, 나!”


송수화기를 집어든 북경시체육공작대 장청계주임 1) 의 귀전으로 호탕한

웃음소리가 날아들었다.

“응? 누구?”

“아니, 이런… 수도에 있더니 형님도 다 잊었는가? 나 문해야, 문해. 장문

해 2) !”

“장문해? 오, 이 정신 봐라. 형님이였구만. 아하하! 이거 미안허우다, 미안

해. 근데 장춘 한끝에서 무슨 바람이 불어가지고…”

“젠장, 돌개바람이 불었어.”

“돌개바람?”

“음, 내가 길림성의 문화오락체육부문을 주관하는 부성장인줄은 자네두 알잖은가.”

“알다마다. 근데?”

“그래, 당신 손을 좀 빌리자구.”

“내 손을? 어떻게?”

“저, 우리한테 괜찮은 지도 한 사람 좀 물색해주게.”


1) 장청계(张青季, 1914-2000년), 하북성 려현(蠡县) 사람, 건국전 지하당원으로 북경시에서 활동. 1965년부터 중공북경시위 선전부 부부장, 위생체육부 부부장 겸 북경시위체육공작대 주임, 중국체육총회 부주석, 중국롱구협회 주석 력임.

2) 장문해(张文海, 1905-1978년), 길림성 장춘시 사람, 공산당원. 해방전 북경에서 지하활동에 참가함. 동북특별위원회 서기, 장춘특별시 비서장을 력임. 해방후 길림성위생청 청장, 길림시 시장, 길림성정부 부성장, 길림성정치협상회 부주석 등 력임.1960년대, 길림성정부에서 문화체육부문을 주관한 장문해 부성장.

장문해



“뭐, 지도를? 무슨 지도?”

“축구지도.”

“축구지도?”

“우리 길림대를 좀 개변해야겠어. 선수들이 투지도 있고 경험도 있는데 기술이 좀…”

“오, 그렇다면… 자, 가만있자. 이제 형님이 말하니까 갑자기 생각나는 사람이 있긴 한데… 적임자인것 같기도 하고.”

“적임자라? 누군데?”

“저런, 형님네 길림성 사람인데 아직 그것두 모르고있었수?”

“우리 길림성 사람이라?”

“그것두 조선족.”

“조선족? 이름은?”

“박만복.”

“박만복?”

송수화기를 들고있던 장부성장이 고개를 약간 기울이며 량미간을 찌프렸다. 의아하다는 표정이였다.

“오, 그러니 그 박씨를 우리한테 소개해주겠단 말이지?”

“그려. 왜? 생각 없어?”

“아니, 생각이 없긴. 복이 넝쿨채로 떨어지다보니 긴가민가해서 그러지. 근데 그 박만복이란 친구 지금 어디에 있는데?”

“어디에 있긴. 여기에 있지. 우리 북경에.”

“북경에?”

“음. 지금 북경청년팀에서 주지도로 활약하고있다네.”


“오, 그런가. 그러면…”

“그렇다면 왜?”

“왜긴 왜? 허허허…”

(박만복이라… 대관절 어떤 친구지?)

1953년 2월 28일, 중국 최대의 산업도시 상해.

20여년전인 1932년 4월 29일, 상해에 주둔한 일본군이 천황의 생일인 천장절을 축하하기 위해 열린 기념식장에서 폭탄을 투척해 조선독립의 의지를 전세계에 떨쳤던 윤봉길의사의 넋이 깃든 홍구공원 1) 바로 동쪽켠에 자리 잡고있는 홍구체육장 2) 안으로부터 요란한 함성이 수시로 터져나오고있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이후 1958년까지 상해시 초대시장이였던 진의(陈毅)원수가 친히 시축공을 날린 전국 11개 도시 청년축구운동대회가 이곳에서 한창 펼쳐지고있었던것이다.


1) 지금의 로신공원.

2) 홍구체육장(虹口体育场), 1999년부터 홍구축구장(虹口足球场)으로 이름을 고쳤음.


그속에서 유일한 소수민족축구팀으로 분전하고있는 연변청년축구팀.

“연변이라? 어허, 저건 어디에 있는 팀이지?”

“연안에서 온 팀인가?”

당시 많은 사람들은 연변이라는 곳이 도대체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감감 모르고있었다. 개중에는 어이없게도 연변을 중국혁명의 성지 연안의 별칭으로 오해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주 그렇다고 긍정하는 맹랑한 사람들까지도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연변청년축구팀의 선수들은 국제적인 항구도시로 널리 알려진 이 중국의 대도시에 연변이라는 조선족자치구 1) 가 길림성의 동부변강에 존재해있음을 자신들의 뛰여난 축구기술로 만방에 알려주고 있었다. 바로 그중에 청년 박만복이 들어있었다. 연변청년축구팀의 주장이라는 성스러운 이름으로 시종 철벽같이 수비선을 지켜 한몸을 던지고있는 박만복.

원적: 길림성 왕청현 하마탕향 영안촌.

1935년 11월 4일, 부친 박사중(朴仕仲), 모친 황정숙(黃贞淑)의 자녀 7 남매중 넷째로 출생.

자격: 연변청년축구팀 주장.

신장: 1.73메터.

체중: 60킬로그람.

속도: 12.8/100메터.


1) 1952년 성립시 자치구였으나 1955년에 자치주로 변경되였음.


전국 11개 도시 청년축구운동대회에서 시축을 하고있는 상해시 진의시장.



그때 박만복의 나이는 겨우 열아홉살, 당시 연변의 중학생들한테 있어서 최고학부의 하나라 일컬어지던 연변제1고중 1) 에서 한창 학업에 단맛을 들이고있을 때였다. 뛰여난 속도, 넓은 시야, 정확하고 빠른 송곳패스가 박만복의 특기였다.

한편 김창길, 김인걸, 김시중, 전만수, 정몽호, 최동섭 등 동료들도 출중한 개인기와 억센 투지를 갖추고있었다. 게다가 이 마당에서는 유일한 소수민족팀이기에 한번만 당해도 어쩔수없이 고립무원한 처지에 떨어진다는 강렬한 소외감은 하나같이 그들을 승전에로 고무했다.


그래서인가 제2조에 편입되여있던 연변청년팀은 광주, 중경,남경 등 팀을 하나하나 꺾고 소조 1등의 자격으로 성큼 결승전에 진출하여 역시 북경, 심양, 서안 등 세 팀을 차례로 꺼꾸러뜨린 제1조의 상해팀과 천진, 무한 팀을 타승하고 올라온 제3조의 려대 2)팀과 격돌하게 되였다. 허나 천시, 지리, 인화의 혜택을 은근히 입고있는 홈장팀—상해팀과의 접전에서 연변청년팀은 최종 0대3으로 패배하고말았다. 하지만 남 먼저 우승보좌에 걸터앉은 상해팀과 0대0으로 빅고 같잖게 준우승을 엿보고있는 려대팀을 맞아 연거퍼 “오리알” 두개를 먹이면서 화끈하게 설욕전을 치렀다.


1) 지금의 룡정고급중학교 전신.

2) 려순과 대련의 총칭.


“야, 2등이다!”

“연변팀이 2등을 했다!”

순간, 환성을 지르는 연변청년팀 선수들을 향해 주석단에 앉아 조용히 두눈을 빛내고있는 중산복차림의 한 중년남성이 있었다. 훤칠한 키꼴에 네모나게 각진 얼굴을 가진 사나이의 자태는 한마디로 름름했다. 팔짱을 턱 지른채 형형하게 영채 도는 눈길로 한동안 흡족히 연변청년팀 선수들을 빗질하고있는 사나이, 그가 바로 그번 시합재판조 조장이며 당시 중국축구대표팀 선수선발위원회 주임이였던 리봉루 1) 였다. 그는 건국전부터 신주대지의 축구인

들사이에 “강북은 리봉루, 강남은 리혜당 2) ”이라는 말이 널리 회자

됐을만큼 당대의 유명한 축구명장이였다.


1) 리봉루(李凤楼, 1911-2000년).

2) 리혜당(李惠堂, 1905-1979년), 해방전야에 향항으로 이주했다가 그후 대만으로 갔음.


전국 11개 도시 청년축구운동대회에 참가한 연변청년팀 멤버들. 앞줄 좌로부터 1. (×××), 2. 전만수, 3. 후보문지기, 4. 엄영덕(주력문지기), 5. 박영옥, 6. 신재호. 뒤줄 좌로부터 1. 박만복, 2. 김인걸, 3. 김창길, 4. 최호균, 5. (×××), 6. 최동섭, 7. 리학산, 8. 김계철, 9. 정몽호, 10. 김시준.




“음…”

이윽고 연변청년팀 선수들을 빗질하고있던 리봉루의 머리가 가볍게 끄덕여졌다.

그해 8월, 연변에 특대희소식이 날아들었다.

그번 시합때 연변청년축구팀의 주장을 맡았던 박만복을 비롯한 김창길, 최호균, 김인걸, 최증석 등 5명의 연변적 선수들이 국가청년팀 선수선발 축구심사반에 선발되였으니 속히 중앙체육훈련반에 도착하라는 국가체육운동위원회의 통지였다.

순간, 박만복은 멍하니 굳어져버리고말았다.

(축구? 그럼 나의 꿈은? 내 의과대학꿈은?)

박만복의 눈앞에는 지나간 옛일들이 삼삼했다.

1945년 철부지시절, 무정한 병마에 어머님을 잃고 슬픔에 잠겨 통곡을 하며 할머니 가슴에 못을 박던 일.

“엄마 대신 할매나 죽을게지. 할매나 죽을게지. 엉…”

그리고 또!

리질에 걸려 약 한첩 바로 써보지 못하고 20일만에 세상 뜨신 할아버지.

또 그리고!



1950년, 박만복이 열여섯살 나던 해, 회충병이라는 몹쓸 병으로 때 이르게 요절한 녀동생을 끌어안고 통곡하며 목 터져라 부르짖던 말.

“의사가 될테다! 난 꼭 의사가 될테다!”

그런데…

누군가 “기회의 신은 더수기에 털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앞에서 놓치면 뒤에서는 잡을수가 없다고.

기회의 신! 하다면…

졸업을 앞둔 박만복의 심정은 착잡하기만 했다.

(계속)


[신철국 장편스포츠실화] 챔피언 1965 (1)



신철국

작가

【신철국 작가 프로필】

1971년 왕청현 하마탕향 전하촌(汪清县蛤蚂塘乡前河村)출생

연변대학 조선언어문학학부 졸업


연변민족문학원(제1기/1994년), 로신문학원(제30기중청년고급연구토론반·아동문학/2016년) 수료.


‹중국조선족백년실록›집필위원회 위원(스포츠) 력임.


연변텔레비죤방송국 청소년부, '흑룡강신문','길림신문'에서 다편간 편집, 기자로 활약. 연변작가협회 회원.


1986년 아동소설 '신방주인'으로 등단.


'화신문학상','압록강문학상','흑토문학상','연변라지오문학상','상익컵 실화문학상' 등 수상경력 다수. 


단행본 장편스포츠실화 ‹챔피언 1965› 출간.


공저로 ‹60주년에 만난 60인›, ‹중국조선족백년실록›, ‹연변축구의 발자취를 찾아서› 등이 있음.


현재 명동문화예술원 부원장 겸 글짓기지도로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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