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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닷컴] (​회고) 거인 장수굴 흔적은 어디가고...(렴광호)

조글로 潮歌网 2020-09-15

회고

거인 장수굴 흔적은 어디가고...


렴광호



나이가 들면 어릴쩍 일이 항상 새록새록 눈앞에 떠오르면서 잊혀지지 않는다. 나의 고향은 길림성 화룡시 숭선이다. 나는 엄격히 말하면 숭선이 고향이라 할수 없다. 왜냐하면 태여난 곳은 지금 어느 향진에 속하는지 모르겠지만 숭선에서 올기강을 거슬러 한 40여리 올라가 석인이란 마을이다. 당시는 행정상 숭선에 속하다가 후에 다른 향에 넘어갔다. 


홍기하(올기강)


나의 아버지는 석인에서 지난 세기 50년대 초에 초급사 주임을 하였다. 그때 농촌은 교통이 불편하여 100여리 되는 화룡에 도보로 회의 참가하러 다니곤 했다.  1954년 겨울, 그번에 현에 가서 회의 참가하고 돌아오는 도중 청산이란 마을에 도착하니 이미 날이 저물었다. 일행은 그 곳에서 밤을 묵기로 하고 여관을 잡았다. 저녁을 먹은 후 한 동료가 술기운에 기어코 집을 간다며 밤길을 떠났다고 했다. 당시 책임자로 간 어버지는 그를 혼자 보낼 수 없어 동무하여 뒤따라 길을 떠났다. 하지만 엄동설한에 변변치 못한 옷차림으로 밤길을 떠난 그들은 몇십리 못가 청산령에서 지친 나머지 쓰러졌다. 영하 30도 더 되는 겨울에 아버지는 그만 동사하고 그 동료는 오히려 멀쩡하게 살아났다고 했다. 그 때 아버지 나이가 한창 24세이고 내가 태여난지 겨우 두달째라고 한다. 


후에 어머니는 홀로 나를 8년 키우시다가 재가하여 이주한 곳이 숭선이다. 그러니 숭선을 고향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내가 살던 마을은 숭선인민공사 숭선대대 제 8소대이고 마을 이름은 웃천벌 또는 상천평(上天坪)이라고도 불렀다.  마을 서쪽으로 이름모르는 산이 있고 서남 쪽에는 올기강이 깊이 50-60메터 되는 협곡으로 마을을 에돌아 두만강과 합류한다. 


고향 웃천벌 마을 앞으로 흐르는 올기강(홍기하)


올기강은 두만강 지류로서 홍기하라고도 하며 만주어로 “멧돼지 강”이란 뜻이다. 올기강과 두만강 합수목에는 마을에서 흘러 내린 논도랑 물로 이루어진 개울이 계곡의 낭떠러지로 떨어지면서 약 20-30메터 되는 폭포를 이룬다. 지금 듣자니 이 곳을 풍경구로 건설하고 또 올기강 표류까지 한다고 한다. 



내가 살던 웃천벌 마을은 당시 두개 생산 소대로서 약 100여호 인구가 살았다. 대약진 당시 고향 사람들은 두만강물을 가로 막아 물길을 내여 작은 수력발전소도 앉히고 관개수로를 건설하여 논밭을 일구어냈다. 두만강에서 끌어 올린 관개수는 마을 서남쪽 강 건너 편에 10여리 되는 원봉벌을 거친 후 계곡 아래 올기강 밑으로 파묻힌  V자형 콩크리트 수관을 거쳐 마을 서쪽 산중턱에 솟구쳐 오른다. 그 모양이 무지개를 거꾸로 놓은 것 같다고 <<도홍공정>>(倒虹工程)이라 불렀다. 



이 관개수로는 우리마을로부터 군함산 뒤로 쭉 뻗어나간 근 30여리되는 하천벌까지 적셔준다. 연변의 명곡 <붉은해 솟았네>의 한 구절인 “강물을 가로 막아 산에 올리네”가 바로 숭선의 이 수리공정을 노래한 것이라 한다.  이 도홍공정의 바로 위로 벼랑을 타고 약 100메터 올라가면 동굴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내가 말하려는 거인의 “장수굴”이다.


군함산과 두만강


군함산 뒤로 보이는 고향마을


지금은 숭선에 가서 “장수굴”을 물어보면 아는 사람이 거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어릴 적만 해도 인근에 소문이 자자한 신비한 동굴이었다. 이 동굴의 특이한 점은 동굴속에 있는 거인 장수의 자취가 바위에 찍혀 있는 것이다. 동굴의 높이는 2메터 정도이고 넓이도 기껏해야 2-3메터 정도이다. 동굴 깊이도 약 10 메터 들어가서 어린애들이 겨우 비집고 들어갈 만한 구멍으로 막히고 만다. 


장수굴이란 유래는 동굴 어귀의 바위에 커다란 거인의 궁둥이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은 것이다. 마치 바위에 걸터 앉아 한 쉼 쉰것처럼 엉덩이 자국과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 어디 그 뿐이랴? 바닥에는 밖으로 향해 걸어나간 발자국이 몇개 있고 바위천정에도 두 손을 짚고 나간 손바닥자국이 몇개 찍혀 있었다. 발자국의 크기는 적어도 40여센치 돼 보였으며 손바닥도 엄청 커 보였다. 손가락 굵기가 어린애 팔보다 더 굵어 보였으니 말이다. 더구나 희긔한 것은 매개의 자국마다 손가락과 발가락이 그처럼 또렷하게 남아있어서 마치 진흙에 손을 대고 일부러 찍어 낸것 같았다. 그리하여 당지 사람들은 이 동굴을 “장수굴”이라 불렀다. 물론 누구도 이 신비한 동굴의 비밀을 알 수 없었다. 


내가 열두살쯤 될 때 탐험소설을 한 편을 보고 친구들과 장수굴을 끝까지 들어가 보자고 충동질했다. 우리 또래 서넛이 손전등을 준비해 가지고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동굴 끝의 좁은 구멍으로 어른들은 들어갈 수 없었지만 어린이들은 기어 들어갈 수 있었다. 한참 몇 메터 들어가니 또 굴이 넓어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우리가 기어가는 굴 밑에 또 좁은 틈이 나있었다. 그 틈아래를 보니 넓고 큰 공간이 보였다. 그 때 마침 앞에서 기어가던 애가 거인 장수가 뛰쳐나올가봐 무서워 엉엉 울고 나도 당황하여 헤덤비던 중 신 한짝을 바위 틈속으로 떨어 뜨리고 말았다. 우리는 부랴부랴 뒤걸음질하여 굴 속에서 기어 나왔다. 그 번의 탐험에서 아무 수확도 없이 새로 산 운동화 한 짝을 잃고 나는 어머니한테 단단히 야단 맞았다.


세월이 흘러 삼십여년 후에 나는 연변대학 교수로 되었다. 당시 지리학부 주임이 나와 가까운 사이였다. 한 번은 그와 잡담중에 아프리카에서 발견된 거인의 발자국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당시 나는 문득 고향의 동굴이 생각 났던 것이다. 그리하여 고향의 장수굴 얘기를 하니 다들 반신반의 하면서도 지리학부 주임은 기회가 되면 한번 가서 확인해 보겠다고 했다.  


얼마후에 지리학부 주임이 나를 원망하면서 장수굴에 가 보니 거인의 흔적이 아무 것도 없더란 것이였다. 나는 그의 말에 어리둥절해졌다. 그처럼 선명하게 바위에 있던 발자국, 손자국이 어쩌면 없어질 수 있단 말인가?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언제가 직접 가서 내눈으로 학인해 보고 싶었다.  


마침내 1999년 봄에 연변대학 조문학부에서 숭선유람을 조직하게 되었다. 내가 그곳 태생이다보니 당연히 의무 가이드로 나서서 스승님들과 동료들에게 고향자랑을 하였던 것이다. 당연히 “장수굴”이야기도 잊지 않고 소개했다.  

   

숭선에 도착한 후  여행을 즐기는 학부주임 김호웅이 나한테 “개천에서 룡이 난다”하더니 기왕 여기로 온 바 하고 렴교수 고향마을을 가보자고 하였다. 내가 앞장 서서 그들을 이끌고 고향마을로 출발했다.  마을에는 안면있던 옛사람들은 거진 없고 마을도 변모하여 돌아볼 멋이 별로 없었다. 우리 일행은 나를 따라 곧추 장수굴로 향했다. 길은 오솔길이지만 별로 위험하지 않았고 내가 어려서 줄곧 다니며 놀던 곳이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동굴어귀에 도착한 나는 드디어 동료들 앞에 기적이 보이게 될 일을 생각하니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데 웬일인가? 그젯날에 그토록 선명하게 남아있던 거인 장수의 자취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나는 혹시나 해서 눈을 씻고 찾아봤지만 끝내 실망하고 말았다. 그때 김호웅을 비롯한 같이 간 동료들은 그저 웃기만 했지만 속으로는 나를 “겉으론 순직해 보이더니 한심한 거짓말쟁이군!”하고 나무랬을 것이다.



얼마 후에 고향친구의 설명을 듣고서야 나는 거인 장수의 자취가 사라진 원인을 알게 되었다.  “문화혁명”시기 전쟁준비를 한답시고 마을에서 방공호를 파게되었다. 누군가 마을에 천연적인 장수굴이 있는데 하필 따로 굴을 팔게 있는가? 장수굴을 좀 넓히면 우리마을 사람들이 충분히 그곳에서 피난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모두들 그말에 호응하여 즉각 장수굴 개조 사업을 벌려 원래의 모든 면모를 깡그리 없애 버렸던 것이다. 


지금 보면 얼마나 아쉬운지 모른다. 만약 그때의 장수굴 흔적을 잘 보존했더라면 내 고향은 세상을 놀래우는 신비한 동굴로 이름을 떨치련만 지금 그저 흘러간 옛말로 되고 말았다. 장수굴 이야기도 아직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묻혀 버려있다.  지금 나같은 견증인이 살아남아 있으니 이 정도의 기록이라도 후세에 전할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만약 그 누가 큰 결심을 하고 거인 장수굴 속을 더 깊이 들어가 탐험한다면 없지 않아 새로운 거인 장수의 발자취나 앉은 자리 또는 손자국을 찾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만약 그 날이 돌아 온다면 고향 숭선은 전국 아니 세계에 소문난 관광지로 될 수도 있을 것으로 기대해본다.


조글로 문학닷컴 2020년 05월 26일 발표

(任选其一)


렴광호


원 연변대학 조문학부

조선어강좌 강좌장

석사지도교수


전 청도대학 

한국어학부 교수


렴광호  작품세계  


[珍藏版] 우리말 어원 산책(렴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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