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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닷컴] (단편) 익애 (서가인)

조글로 潮歌网 2020-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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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익애


서가인



나는 북경으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객차 간에는 여기저기에서 코 고는 소리가 간간이 들려온다. 자정이 넘었지만 눈은 점점 더 말똥말똥 해진다. 나는 배낭에서 노트와 만년필을 꺼냈다--

기차에 오르기 전 대합실에서 여섯 살 난 아들이 땅바닥에 뒹굴면서 울어서 나는 몹시 난감했다. 안해는 아들을 달래느라고 내가 출구를 나가는 것을 보지 못했다. 나는 안해와 눈이라도 마주치려고 하였는데 얼굴에 비 오듯 땀을 흘리며 아들을 끌어안고 있는 안해를 보자 코등이 시큰거려 머리를 돌렸다. 플랫폼으로 나갔지만 저도 모르게 돌아서서 대합실 방향을 바라보았다.생각은 대합실에서 아들과 안해를 포옹하고 출구로 나가면서 팔을 들어 흔드는 상상을 했다. 그런데 완전 정반대 상황이다.그동안 아들이 나와 정이 많이 들었던 모양이다--

북경은 기차를 타고 여러 번 지나갔지만 이번에는 두 번째로 가는 종착역이다.


<아버지: 이제 몇 시간 후이면 북경에 도착합니다.그동안 빈둥거리면서 산 저를 먹여주고 재워주고 하루도 거르지 않고 저녁마다 술까지 권하는 아버지에게 무엇이라고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22년 전 제가 고향을 떠나 북경에 갈 때 아버지는 직접 역전까지 나오셨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이 느끼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도 철이 안 들었지만 그때도 그랬습니다.

지금은 몇 천명의 직원을 거느리고 있는 리회장이 이번에도 저에게 일자리를 하나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물론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지만 다시 만날 자신은 없지만 티 없이 맑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나의 아들 때문에 이번 길을 결심하게 되였습니다.> 나는 덜커덩거리며 들려오는 완행열차 바퀴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창밖을 바라보며 깊은 사색에 잠겼다--


22년 전 나는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는데 삼촌이라고 부르는 사람을 따라서 북경 줘쟈쫭(左家庄)이라는 곳의 낡은 아파트 13층에서 창업을 시작했다. 한 층에 여덟 집이 사는데 중간에 엘리베이터가 한대만 있는 낡은 고층 건물이었다. 아침과 저녁은 일층과 엘리베이터 안은 사람들로 차고 넘쳤다. 북적북적하는 것이 장마당이 따로 없다. 어떤 원주민은 외지에서 온 우리를 대놓고 욕을 해댔다. 엘리베이터 관리인은 좁은 엘리베이터 안에 놓인 높은 걸상에 앉아서 당구채 같은 긴 막대기로 엘리베이터 문을 막고는 출근길에 늦은 직장인들이 조급해 하건 말건 채소 사가지고 돌아오는 원주민들을 먼저 엘리베이터에 오르게 하였다. 한 번은 조식을 사려 내려갔다가 기다리다 못해 하는 수 없이 계단을 리용한 적이 있었다. 그 후 다시는 아침에는 내려가지 않고 미리 준비하여둔 것으로 아침을 지어먹었다.


13층에는 다섯 집이 창업하려 전국 각지에서 모여온 사람들이었다. 모두 사기가 왕성한 젊은이들이었다. 삼촌은 이미 사십 대였지만 열정이 우리 젊은이들보다 더 강했다. 낮에는 모두 나가 영업하느라고 바빴지만 저녁에는 가끔 모여서 큰 병 콜라를 같이 마시며 경험을 공유 하였다.그때 모두 그랬듯이 내 월급이 500원이었다. 아버지는 월급을 너무 적게 준다고 전화로 몇 번이나 모자라면 부쳐준다고 말씀하셨다. 월급 외의 모든 지출은 회사에서 결산하였기에 월급은 별로 쓸데가 없었다.


방이 두개였는데 큰 방은 사무실로 쓰고 작은 방은 삼촌과 같이 썼다 삼촌은 입버릇처럼 우리는 꼭 성공한다고 하면서 돈을 벌면 이곳보다 더 좋은 집을 아예 사서 이사 나가자고 하였다.그리고 나보고 때가 되면 예쁜 색시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돈 한 푼 내지 않은 나에게 회사지분도 10% 갖게 하였다. 희망을 갖고 산다는 게 얼마나 즐거운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보드라운 밀가루처럼 날아다니는 황토바람을 맞으며 하루 종일 돌아다니다가 저녁에 집에 와서 목욕을 하고 나면 거뜬했다. 하루하루를 희망차게 살았다. 비록 술을 마실 수 없었지만 마시겠다는 욕구도 없었고 사는 것이 이만하면 살만하다고 느꼈다.


그러던 어느 날, 밖에서 돌아오니 삼촌이 채소를 볶고 있었다. 고소한 돼지고기 냄새가 났다. 정해놓고 한주일에 한 번밖에 고기를 먹지 않았는데 그날은 먹는 날이 아니었는데,식탁 위에는 내가 좋아했던 맥주도 한 병 놓여있었다. 삼촌의 제의로 밖에서 그것도 바이어들과 같이 식사할 때 한 컵 정도 마시는 것 외에는 집에서는 절대 마시지 않았다.


열다섯살 때부터 아버지와 한상에서 술을 마셨는데 나는 북경에 와서 다섯달을 거의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삼촌은 큰일을 하려면 술 마시는 것을 억제할 줄도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 술을 마시면 판단력이 흐려질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나에게 술 마시는 것을 배워준 것이 나쁘다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기쁠 때 술로 흥을 돋우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너의 아버지께서 어제 전화가 왔는데 네가 아직 어리다고 공부를 더 시키겠다고 하더구나.”삼촌이 나에게 맥주 한잔을 부어주었다. 나는 삼촌의 말씀을 듣고 깜짝 놀란 기색을 보였다. 며칠 동안 아버지와 통화하지 않았다는 것이 생각났다. 돌아가려는 생각은 꼬물만치도 없었다. 나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하였다. 삼촌도 내가 돌아가지 않았으면 하는 눈치였다.

"김홍, 너는 그만하면 머리도 나쁘지 않으니 지금처럼 쭉-나가면 꼭 훌륭한 인재가 될 거야…” 삼촌은 왜 그런지 나를 붙잡지 않았다. 삼촌은 내가 판단하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그때 내 나이 스물한살이었다.


갑자기 핸드폰벨이 울렸다. 내가 밖에 나가 아버지 전화를 받고 돌아오니 삼촌은 술잔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앉아있었다. 공부를 더 한다면 막지는 않겠다. 그러나 다른 회사에서 돈을 더 준다고 하는 데는 좀 생각해 보라고 하였다. 삼촌은 병에 남은 술을 모두 나의 잔에 부었다. 아버지가 나를 공부시킨다는 것은 핑계인걸 안 것 같았다. 한국 사장이 하는 회사에 나를 입사시키는 것이 아버지의 생각이었다. 월급이 북경의 한배인 1000원인 데다가 집에서 다닐 수 있는 게 나를 좀 망설이게 하였다.


이틀 고민하다가 마음의 결정을 했다. 삼촌은 내가 말을 꺼내자 서랍에서 봉투를 꺼내더니 내 손에 꼭 쥐여 주면서 아무 곳에서 나 자신을 믿고 일하라고 하였다. 속담에 개도 안 먹는다는 돈에 나는 눈이 어두웠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니 나는 인생을 그리 잘 살지 못했다. 나는 영원히 자라지 않은 어린애인 것 같았다. 나는 어머니가 해주는 따뜻한 밥과 편안히 잠을 잘 수 있는 내방이 그리웠을 뿐이다. 그때 내가 집으로 돌아가지 말았어야 했는데 성격이 나약한 나는 돌아가는 것을 선택했다. 아버지의 잘못이 아니었고 아버지는 고생하는 내가 애처로웠던 것이다. 그러나 돈의 작용이 내가 돌아가는데 큰 보탬을 한 것은 사실이다.


내가 집으로 돌아간 20여년 동안, 삼촌은 개혁의 바람을 타고 회사를 큰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물론 삼촌의 지속적인 노력이 없었다면 지금이 없었을 것이다. 가끔 어머니의 지인들을 통해 삼촌의 소식을 전해 듣곤 했다.

나는 아버지가 소개해 준 한국인 회사에 들어가 사장의 수행원이 되였다. 한국인 방사장은 무역을 얼마나 잘하는지 몰라도 완전 난봉꾼이었다. 서울에 가족을 두고 온 방사장은 풀어놓은 망아지 같았다. 낮에 몇 번 전화가 오가면, 그날 일은 끝나고 초저녁부터 가라오케에 갔다. 시골에서 올라온 조선족처녀들이 방사장의 주위에 몰려있어서 나는 밤늦게까지 기다려야 했다. 거의 매일 술에 취한 방사장을 숙소까지 데려다주고 집에 오면 새벽녘이었다. 내가 희망하는 삶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어떤 날은 부엌에서 아침밥을 준비하던 어머니는 아침에야 들어오는 나를 서글픈 눈으로 바라보군 했다.


매일 가라오케에 다니다 보니 나는 그곳의 삶에 점점 익숙해져 갔다. 나는 술을 마음대로 마시기 시작했다. 돈 때문에 나는 방사장의 별의별 심부름을 다했다. 이렇게 살면 안 되는데 하면서 나는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5년 후 방사장이 사업이 망해서 한국으로 돌아가서야 나는 며칠을 방에서 나오지 않고 잠을 실컷 잤다. 아버지는 내가 직업이 없어져서 속상해하는 줄 알고 문밖에서 서성거리며 조금만 기다리라 하셨다. 일자리는 없어졌고 아버지가 연회에 참가하지 않는 날은 집에서 같이 술을 마셨다. 웃기는 것은 같이 술을 마신 날은 탁상공론을 열심히 하였다 이튿날 눈을 뜨면 어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주량도 점점 늘어났다.


일년 만에 아버지는 나를 놓아주셨다. 먼 심수에 있는 친 고모에게 보내였다. 고모는 한국인과 결혼해서 살고 있었는데 고모는 나를 고모부의 회사에서 일하게 하지 않고 다른 한국회사에 소개했다. 같은 김씨라고 고모는 김사장이 잘 해줄 것이라고 했다. 김사장은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하게 생겼다. 그런데 조선족을 발뒤축 때만큼도 안 여기는 그런 사람이었다. 마치 굶어죽어가는 사람을 구해준 것처럼 은인으로 행세했다. 1년을 못벋티고 나는 회사를 나왔다. 김사장은 사표를 던지고 나가는 나를 한참 노려 보더니 마구 욕을 퍼대는 것이었다. 참고 있던 것이 한순간에 폭발했다. 난생처음으로 김사장과 맞짱을 떴다. 배가 나온 김사장은 이삭을 따버린 옥수수대처럼 푹석푹석했다.  나는 별로 힘을 들이지 않고  한번에 땅바닥에 둘러메쳤다. 사무실 직원들이 우르르 몰려왔으나 모두 한결같이 소리만 지를 뿐 다가오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김사장의 배에 발길질을 했다. 그제야 두, 세명이 다가와 나를 잡아끌고 김 사장을 일켜 세웠다. 김사장은 씩씩거리며 삼각 눈으로 나를 째려볼 뿐 입은 다물고 있었다. 양처럼 순해 보이던 녀석이 삽 시에 사자로 변해버린 나를 어떻게 대하여야 할지 어리둥절한 것 같았다. 얻어맞아 창피하여서인지 아니면 직원들 앞에서 아무 리유 없이 쌍욕을 퍼부은  자신이 부끄러워서인지 그것은 알 수 없었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유유히 회사를 걸어나왔다. 우유부단하고 나약했던 내가 난생처음 싸움을 했다. 후에 들은 말이지만 그러지 않아도 김사장의 천대를 받으며 일하던 직원들이 그날 무척 통쾌했다고 했다. 평상시 별로 가깝게 지내지 않았던 동료들이 밥까지 사주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그만둘 수 없는 처지에 있는 그들은 나를 존경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나는 수입이 괜찮은 직업을 날려 버렸다.


고모집에서 잠시 신세를 지기로 하였다. 고모는 나보고 좀 참지 그랬냐고 나무람 했다. 고모부는 소식을 들었는지 아무 말은 하지 않았지만 분위기는 싸늘했다. 왜 그런지 고모는 고모부의 눈치만 보는 것 같았다. 심성이 착한 데다가 이쁘기까지 한 고모는 다리 하나가 불구인 고모부에게는 돼지목에 진주 목걸이였다. 어른을 함부로 비교하는 것은 나쁘지만 고모부는 얼굴에 칼을 대서 이쁜 한국 처녀보다 자연산인  이쁜 고모를 안해로 들이고도 항상 이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고모가 불쌍해 보였다. 그때는 조선족처녀들이 한국인에게 시집가는 게 로망이었다. 고모는 일반 한국인이 아닌 사장님께 시집간 데다가 전직주부로 사니 우리 현성에서는 딸 가진 조선족 부모는 모두 고모를 부러워했다. 선물을 사들고 한국과 교류가 넓은 아버지를 찾아온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나는 고모집에서 한달을 버티지 못하고 나왔다. 어떻게 된 일인지 심수에 있는 한국기업을 다 다녀보았지만 나를 받아주는 데는 한곳도 없었다. 나는 내가 고등학교 졸업장밖에 없는 게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를 탓하지 않았다.


대학시험 보기 전날 아버지는 밖에 나가지 않으셨다. 아버지는 모태주 한잔을 나에게 권했다. 비싼 술이니 한잔 마시면 래일 시험을 잘 볼 거라고 하였다. 나는 15밀리리터짜리 술잔으로 한잔을 마시고 침실로 들어갔다. 그런데 선물 받은 술이 가짜인 것을 누가 알았겠는가-- 나는 병원에 이틀이나 누워 있었다. 조금 더 마신 아버지는 일주일을 병원에 계셨다. 다음 해에 다시 대학 시험을 볼 수 있었지만 나는 복학을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내가 하려고 하는 일과 하지 않으려는 것을 무조건 들어주셨다. 아버지는 나보고 걱정 말라고 하셨다. 아버지는 체제 내의 사람이어서 나오는 돈으로 나를 평생 먹여 살릴 수 있다고 하였다. 그때는 늦잠 자고 놀러 다니는 게 그렇게 신나고 좋았다. 아버지가 우러러 보였다. 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직장에 다녔으나 아버지 부하가 소개한 직장은 나에게 맞지 않는 직업이었다. 차라리 집에서 노는 게 편했다.


고모는 나보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였다. 이곳에서는 아무도 나를 받아 주지 않을 거라고 했다. 억울해서 돌아갈 수가 없었다. 한달 만에 심수에서 제일 큰 가라오케에 입사했다. 이곳에서는 숙사를 제공했다. 물 만난 물고기처럼 나는 금방 익숙해졌다. 인물이 훤칠한 나는 아줌마들 사이에서는 최고 인기가 있었다. 돈에 대한 개념이 없었기에 버는 대로 다 써버렸다. 이렇게 청춘을 놀고먹는데 허비하였다. 엄마가 몸이 안 좋으시다고 하여 이제는 집에 가야겠다고 돌아왔을 때, 나는 이미 30대 초반이 돼여있었다. 아버지는 나보고 장가가라고 하였으나 수중에는 가진 돈이 없었다. 아버지는 처음으로 나에게 한마디 하셨다. 나는 떠도는 부평초처럼 그동안 덧없는 세월을 보냈다.


어느 하루 아버지는 일본에 가는 게 어떠냐고 하시었다. 그때는 이곳 현성에 일본바람이 불 때였다. 나는 일본어도 모르는데 어떻게 일본에 갈 수 있는가고 물었다. 가서 배우면 된다고 하시었다. 나는 생각도 해보지 않고 아버지의 말씀을 따르기로 하였다. 모두 세 사람이 성소재지에 있는 일본 령사관에 가서 면접을 보았다. 그 전날 이모가 갑자기 아파서 병원에 가는 바람에 어머니는 부랴부랴 문밖을 나가면서 내일 아침 일찍 떠나야 하니 일찍 자라고 하였다. 집안일에 항상 바쁜 엄마의 뒤모습을 바라보며 돌아서는데 아버지는 소파테이블에 와인 한병을 마개를 떼서 올려놓고 있었다. 아버지는 이번엔 돈을 좀 썼기에 틀림없으니 걱정 말라고 하면서 와인 한 잔을 권했다. 마시다 보니 두병을 마셨다. 아침에 늦게 일어나는 바람에 제시간에 약속 장소에 도착하지 못하여 려행사의 승합차가 떠난 뒤였다. 부랴부랴 비싼 돈을 주고 택시를 불러 령사관에 제시간에 도착할 수는 있었다.


두명은 려권에 승낙도장을 받았지만 나는 탈락되었다. 대학 졸업증이 진짜와 똑같아 문제없었는데 면접관이 물어보는 문제를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같이 간 사람 모두 가짜 졸업증이었는데 그들은 쉽게 통과되었다. 아버지의 잘못이 아니고 내가 운이 나빴던 것이다.


어머니는 나에게 북경에 있는 삼촌에게 가서 일을 착실히 배우는 게 어떤가고 물었다. 이제부터라도 시작하면 늦지 않다고 하였다. 일 배우는 것은 어디에서도 할 수 있다면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침실에서 다투는 소리를 들었다. 아버지는 나를 사랑하셨다. 북경의 탁한 공기를 매일 마시고 뙈약볕에 다니며 영업하는 것을 애처로워 하셨기에 가지 못하게 한 것이다. 나는 매달 샘물처럼 솟는 아버지의 월급에서 조금만 받아써도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덧없는 세월은 이렇게 흘러갔다.누가 행복한가고 물었다면 나는 사는 것이 편했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아버지 친구의 주선으로 나는 30대 후반에 결혼했다. 별로 하고 싶지 않았지만 사람 사는 세상에 살려면 짝을 맞추어 살아야 한다고 아버지께서는 말씀하셨다. 아무튼 결혼은 나쁘지는 않았다. 좋은 직업에다 예쁘게 생긴 처녀가 왜 나 같은 백수에게 시집 오려고 하는지 처음에는 의심했는데 살다 보니 이것도 아버지의 덕택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체제 내의 사람이 아니라면 나 같은 백수를 누가 거들떠보기나 했겠는가-- 나의 안해가 금두꺼비 같은 아들을 낳아서 아버지는 대를 이을 손자가 생겼다고 집에서 큰 잔치를 하였다.


또 몇 년이 흘러갔다. 아들이 말을 하기 시작하자 호기심 많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매일 이것저것 물어왔다. 문뜩 어느 날 나는 무서움이 몰려왔다. 아들이 나 같은 사람이 될까 봐 걱정되었다. 나는 아들에게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물려줄 것이 없다는 걸 그제서야 깨달았다.


나는 이미 40이 넘었다.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아가야 할지 막막하다. 아버지가 퇴직하고 집에 계시자 아버지 주위에 있던 삼촌들은 모두 다 어디로 갔는지 아버지께서 아프셔도 한명도 나타나지 않았다. 아버지가 장수하시면 샘솟듯 매달 나오는 월급이 우리의 생활은 윤활하게 해주나 나는 내 아들에게 해줄게 없다. 그리고 내가 늙어 못 움직일 때 아들 보고 책임지라는 말을 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나는 렴치를 불고하고 북경 삼촌을 찾아가서 다시 일자리를 부탁하려 생각했다.


<아버지는 이번에도 내가 북경에 가는데 동의하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손자를 봐서 저는 백수의 생활을 접기로 하였습니다. 공허한 퇴직생활에 옆에 있어드리지 못하는 못난 자식을 용서하십시오.>


나는 만년필을 손에 쥔 채 창밖을 내다보았다. 왠지 눈물이 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희미한 누런 등불 빛이 언뜩언뜩 지나간다. 얼마 전 집에 놀러 왔던 어머니 지인들이 하는 말을 어쩌다가 엿듣게 되었다. 이미 오래전 일이지만 북경 삼촌의 친형이 어머니와 처녀 총각 때 죽고 못 사는 련인 사이였다고 한다. 그런데 어떻게 돼서인지 어느 날 어머니는 갑자기 아버지와 결혼하였다. 삼촌의 친형은 그 후 봉황산의 절에 들어갔다고 한다.


어머니가 새색시 상을 받을 때 상 아래 작은 상의 차림은 나의 것이었다. 어머니는 나를 임신하고 결혼식을 올렸다. 어렸을 때 사진책에서 이 사진을 보고 어머니에게 물은 적이 있다. 그때 엄마가 뭐라고  했는지 지금은 생각나지 않는다--


려명이 다가와서인지 동쪽 하늘이 희끄무레하다. 조금 있으면 해가 뜨겠지… 북경 역이 가까워오고 있다. 나는 필기책과 만년필을 배낭에 넣고는 두 팔을 쭉 펴며 기지개를 했다.


2020년 6월 7일 상해에서


조글로 문학닷컴 2020년 7월 30일 발표 

 서가인瑞家人

소설가

자유기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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