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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조선족] 9.소학교시절 리남붕선생님과 그의 가족(리광인)

조글로 潮歌网 2020-09-15


 민족기억 

사진 클로즈업 70년대 사람들

- 광인이와 그의 친구들의 이야기


리광인


9.소학교시절 리남붕선생님과 그의 가족


리남붕선생 가족사진 라북에서 (앞줄 좌1  리남붕선생 부인 김정숙, 좌2  리남붕선생)


 조글로에서 70년대 조선족 사진련재를 시작한후 한국서 리초향씨로부터 연락이 왔다. 소학교 저급학년  시절 리남붕선생의 딸이였다. 그렇게 메시지와 통화가 이어지면서 기억속에서 사라져가던 리남붕선생이 50여년 세월후 다시 떠오르게 되였다. 


리남붕선생 ㅡ 지난 50년대 중반 연변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선후로 화룡현 신동소학교와 토산중심소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며 앞날이 창창하던 리남붕선생은 이른바 우파분자와 감옥살이로 두번이나 억울한 사건을 겪으며 불운한 삶을 살아야 했다. 


오늘의 70년대 옛사진 련재 9는  리남붕선생과 그의 가족, 자녀들 사진으로 엮어진다. 사진 아래에 "인생소감" 글을 올리니 여러 분들, 더우기 리남붕선생 관련 고향의 선후배님들, 동년배들의 진지한 왕림을 기대하여 본다...


리남붕선생


리남붕선생 부인 김정숙


리남붕선생


리남붕선생과 부인 김정숙


흑룡강성 라북현으로 이사한후 리남붕선생(가운데 분)


리남붕선생 왕청현 배초구 리화소학교 졸업사진(1949.12.26)


리남붕선생 연변사범학교 시절 (1954.6.26)


연변사범학교 시절



연변사범학교 졸업하고 인민교원 생활 시작하면서


화룡현 화룡진 신동소학교 교원시절


화룡현 신동소학교 시절 (1957년)


리남붕선생의 동생 리철붕과  리남붕선생 가족사진



그 시절 화룡현 동성공사 광동4대서 생활하던 리남붕선생 둘째 누님 리금선과 남편 최언비 가족사진


리남붕선생의 둘째 아들 리봉호와 딸 리초향 어린 시절


딸 리초향 어린 시절


리남붕선생의 장자 리상호(앞줄 좌2)가 1976년 2월 흑룡강성으로 이사가게 되면서 고향의 친구들과 


나로 말해 고향의 후배친구들


고향의 나 후배친구들


고향의 동년배, 후배친구들


리남붕선생의 부인 김정숙(뒤줄 좌1)과 토산8대 녀성들


리남붕선생 딸 리초향과 딱친구 박춘자 어린 시절


리초향의 토산소학교 시절 사진 (1972년)


흑룡강성으로 이사간다고 리초향과 그의 친구들 함께 (1976년)


리남붕선생의 장자 리상호씨


리남붕선생의 둘째 아들 리봉호씨



흑룡강대학 법률학부에 입학한 리남붕선생 막내 리영호씨


큰아들 리상호씨 결혼식


큰아들 리상호와 김춘화 결혼사진


큰아들 결혼식과 리남붕선생


리남붕선생의 조선 누님 놀러 오셨을 때  (1971년)


흑룡강성 라북현으로 이사간후 큰아들 리상화와 그의 친구들 (1978년)

리남붕선생과 라북현 동명소학교 선생님들 함께 (1979년)


리남붕선생의 자녀들과 후손들


리남붕선생의 두 아들과 친구들

리초향과 친구 리미화 기념사진



리초향 ㅡ 친구 채분옥, 박춘자와 함께 (화룡에서)


리초향과 그의 오빠들 (뒤줄 좌1 둘째 오빠 리봉호, 좌2 큰 오빠 리상호, 고모네 넷째 아들 최창용 오빠, 앞줄 좌1이 리봉호 녀친 리순자)


2020년 5월 4일



【인생소감】

 


소학교 시절 리남붕선생님과 그의 가족


 

 

지난 4월 10일부터 중국조선족 최대문화사이트ㅡ조글로 위챗계정에서 사진 클로즈업70년대 사람들 련재를 시작한후 4월 15일 생면부지의 리초향씨로부터 워이신 가입신청이 왔다. 모르는 이여서 응대를 하지 않았더니 다시 워이신 가입신청이 떠오르면서 자기는 화룡현 토산자출신이라고 한다. 고향의 후배 리초향씨와의 워이신가입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알고보니 리초향씨는 고향의 토산중심소학교 교원으로 활동한 리남붕선생의 따님이였다. 처음에는 조글로 70년대 사람들 련재를 몰랐는데, 미국에서 생활하는 초향씨 고향친구로부터 고향의 옛사진들이 련재된다면서 련재전재물을 보내왔다나. 그렇게 조글로 70년대 옛사진 련재를 접하면서 고향의 옛사진들을 보니 고향 토산자 시절이 떠올랐고. 뜻하지 않게 불운한 운명을 살아간 아버지가 사무치게 그리웠다는 리초향씨.


따라서 언녕 기억속에서 사라진 고향 소학교시절의 리남붕선생을 금시 보는듯 하다. 어리둥절한건 소학교 저급학년 시절 리남붕선생은 생생히 기억되지만 그후의 리남붕선생 인상은 감감이기만 하지.  1968년 7월 5일에 찍은 그 시절 우리 화룡현 토산중심소학교 졸업사진에도 리남붕선생은 보이지 않는다. 토산중심소 시절에 앞서 리남붕선생은 세월속 우파모자인가 쓰고 고생하셨다는 인상은 사라지지 않았는데, 우리 졸업사진에도 보이지 않으니 무슨 연고라도 있는것 같다.


그 궁금증은 련일 수천자에 달하는 리초향씨의 메시지와 수차의 통화에서 풀리였다. 리남붕선생은 일찍 억울하게도 우파모자를 쓰고 3년이나 고생하셨는데, 우파모자를 벗고 토산중심소학교서 교편을 잡은후 또 억울한 사건에 휘말리면서 5년간 감옥살이를 해야 했다. 그5년간 감옥살이가 1964년부터 1969년까지 기간이니 우리 소학교 고급학년 시절, 그런 기막힌 불운한 운명으로 리남붕선생은 1968년 7월의 우리 소학교 졸업사진에 나타날수가 없었다.


(그런 연유였구나!)

뒤늦게나마 언녕 기억속에서 사라진 50여년 전 소학교시절의 리남붕선생를 떠올리니 리남붕선생의 삶은 기구한 운명의 불운한 삶이였다. 고향의 소학교에서 그런 기막힌 운명과 맞띄웠다는것이 남의 일 같지가 않다. 소학교 시절은 철부지 시절의 련속이어서 리남붕선생이 옥살이를 한다는 기억도 남지가 않는다. 그러던 리남붕선생이 50여년이 지나 다시 기억속에 떠오르며 60년대 세월속에 살아 움직이니 인연은 인연인가부다. 뗄래야 뗄수 없는 끈끈한 고향인연이겠지.


리남붕선생의 따님 리초향씨(1962년 생)에 따르면 리남붕선생(1935.5.281983. 7.16)은 왕청현 배초구 리화촌 출생선생의 어머니는 박영화로서 강원도 인제 사람이다조선에서 언제 두만강을 건너 왕청현으로 이주하였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왕청현 리화촌에서 생활할 때 집에는 박영화와 그의 오빠 박동근 오누이 뿐이였다고 한다박동근은 후날 30년대 초반과 중반시절 연길현항일유격대대 첫 대대장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 제1퇀 퇀장으로 활동했던 이름난 항일혁명가였다.



리초향씨는 필자와의 통화에서 할머니 박영화는 생전에 손녀인 자기와 박동근은 결혼도 하지 않고 독신으로 있다가 희생되였다고 늘 이야기하였다고 말하였다. 박동근의 영향으로 그의 누이동생 박영화는 물론 박영화 한 가족도 항일에 몸바쳐 싸운 항일가족(박영화의 남편 즉 리남붕선생의 아버지 리영춘과 리영춘의 동생은 항일전에서 희생) 이였다. 박영화는 남편과의 사이에 자식 넷을 두었으니 큰딸 리금순과 둘째 딸 아래로 리남붕과 리철붕 두 아들이 태여났다. 2녀2남중 셋째가 바로 후날의 리남붕선생이였다.


리남붕은 어린 시절을 고향인 왕청현 배초구 리화촌에서 보내며 리화소학교를 다니였다. 리화소학교 졸업은 1949년 12월로 알려진다. 그후 연길시 연변사범학교에서 공부하다가1955년 3월에 졸업하고 화룡현성의 신동소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신동소학교 시절 리남붕선생은 이 소학교의 박어금선생과 더불어 전국모범교원의 영예를 지니며 앞날이 창창한 한창 나이의 젊은이였다. 그 시절 그는 연길현 조양천 출신 농촌처녀 김정숙을 만나 결혼에 이르렀으니 신동소학교에 출근한 이듬해 1956년에 슬하에 첫 아들 리상호를 두게 되였다.


둘째 아들 리봉호는 1958년 생으로서 그 시절 화룡현 동성 흥성에서 고고성을 터치였다. 왜서 형 리상호처럼 화룡진이 아닌 동성일가, 여기에는 이들 인핀리씨 가족의 눈물나는 첫 이야기가 깃들어 있으니 한창 나이 1958년 이른바 반우파투쟁에서 리남붕선생은 얼토당토않은 우파로 몰리여 3년간 우파모자를 쓰고 로동개조를 하여야 했다. 필자가 화룡현 토산중심소학교 저급학년 시절 들은 우파이야기는 사실이였다.


지난 4월 24일 아침 필자는 고향마을에서 형님으로 모시는 박원실씨와 전화통화를 가지였다. 허물없는 박원실씨와 간단인사를 나누곤 토산중심소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던 리남붕선생을 아는가고 물으니 너무도 잘 안다는 박원실씨. 박원실씨 친동생 박원철씨는 리남붕선생의 제자로서 소학교 1학년부터 3학년까지 리남붕선생을 담임교원으로 모신 경력자였다.


박원실씨는, 리남붕선생은 이른바 우파로 몰려 고생하다가 풀린후 화룡진 신동소학교 아닌 토산중심소학교에 밀리였다면서 선생은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 추고, 문학도 미술도 서법도, 운동도 모두가 능한 재간둥이 선생이였다고 회고하였다. 이는 아버지를 회고하는 리남붕선생의 딸 리초향씨의  회고와 같았다. 박원실씨는 또 리남붕선생이 우파로 몰린 로동개조 시절 화룡진 부근의 어느 채석장이 아닌 장백산아래 화룡현 광평농장 집짓기에나섰다고 긍정적으로 말하였다.


흥미로움은 리남붕선생 등을 책임지고 관리하는 분이 우리 고향마을의 박상묵씨였다는점. 박상묵씨는 1947년 토지개혁 시절 토산촌 촌장으로 활동하다가 항미원조 싸움터에서 소속부대 수장의 통역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제대되여 고향으로 돌아온 후에는 당년 화룡현 현정부의 직접 파견으로 제1차로 건설되는 1958년 화룡현 광평농장에 가서 리남붕선생 등 관리자로 나서게 되였다.


박상묵씨는 고향시절 중소학교 소꼽친구 박병화의 아버지로서 필자도 알고있는 터였다. 그런 박상묵씨가 박원실씨와의 통화에서 떠오르니 광평농장 집짓기로동에 나선 리남붕선생은 말없이 일잘하며 활약적인 분이였다고 한다. 로동의 휴식시간엔 노래를 배워주거나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웃기는데서 리남붕선생이 있는곳엔 늘 웃음이 흐르거나 분위기가 좋았고.


3년 우파살이를 끝내고 토산중심소학교에 배치되여 1학년부터 3학년까지 학생 박원철, 신순옥 등 제자들 학급 담임교원으로 나섰다. 그런 리남붕선생은 교학이나 무어나 남달라 교도주임 물망에 올라 있었다. 그 시절 토산중심소학교 교장은 우리 소학교시절에도 교장으로 활동한 김인수였다. 헌데 뉘 알리오, 김인수교장이 한동안 외출하면서 소학교에 계시지 않는기간 리남붕선생은 또다시 얼토당토않은 무함에 걸려 들줄을. 김인수교장이 돌아왔을 때는 이미 때가 늦었나부다. 리남붕선생은 억울하게도 5년 감옥살이를 살아야 했다.


5년 옥살이 기간 농촌호구인 안해 김정숙씨가 시어머니 박영화를 모시며 어린자식 넷을 먹여 살리며 공부시켜야 했으니 그 아글타글 고생살이는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아버지가 옥살이 한다며 어린 아들들이 동년배들의 괄시를 받을 때면 피눈물이 쏟아졌다. 5년 감옥살이를 마친 리남붕선생은 집이 있는 토산자로 돌아왔지만 교원직을 떼우고 토산8대에서 농사를 지어야 하는 억울한 불운의 삶을 살지 않으면 안되였다.


3년 우파살이에 5년 옥살이, 불운의 운명은 어쩌면 리남붕선생에게만 행해지는것만 같다. 철부지 소학시절인데서 필자는 이같은 선생의 운명을 알지 못하였다. 50여년 세월이 흐르면서 선생의 따님 리초향씨와 고향의 형님 박원실씨를 통해서야 알게 되였으니 미안함이 없선다. 뒤늦게 밝혀지는 1968년 7월의 우리 소학교 졸업사진에서 빠진 리남붕선생의 기구한 인생, 그것도 타향이 아닌 고향의 정든 모교ㅡ화룡현 토산중심소학교에서 나타난 사실이라는것이 통분하기만 하다.


그래도 리남붕선생은 절망하지 않았다. 선생은 희망을 갖고 살아보겠다고 1976년 2월에 일가식솔을 거느리고 옛날 북만땅이라 불리운 흑룡강성 라북현으로 이사를 갔다. 타향에서 리남붕선생은 그곳 생소한 환경과 어울리며, 그곳 조선족사회와 어울리며 새로운 삶을 개척해 가시였다. 10대 중반의 자식들을 키워 시집장가를 보내며, 막내를 흑룡강대학 법률학부를 보내며 살다가 질환으로 타향에서 생을 마감하니 49살의 아까운 나이...


(항일혁명가로 활동하셨던 리남붕선생 어머니 박영화는 1967년에 59세로 화룡현 토산자서 세상 뜨시고, 안해되는 김정숙은 2002년에 73세로 세상 뜨시였다...)

 

리남붕선생님, 고이 잠드세요!

고향은 선생님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

고향은 선생님을 리해하고 있습니다 !

 

2020년 5월 2일, 위해 석도에서




文章已于2020-05-04修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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精选留言

  • 李光仁(朋友)

     3

    정금자ㅡ 옳습니다. 옛날 사진 보고 알았습니다. 저도 토산소학교 졸업생입니다. 이렇게 우수한 분이 계서 옛날 추억도 되살리네요.  오늘 하루도 즐겁게 보내세요2020.5.4

    作者

     2

    반갑습니다. 고향의 후배되네요 !

  • 李光仁(朋友)

     1

    박관일ㅡ 리남붕선생님께서 무슨 이유로 억울하게 옥살이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조룡남선생자서전 (꾀꼬리가 다시 울기까지)를 떠올리게 합니다 꺼질줄 모르는 인간의 생명력에 박수를 보냅니다 2020.5.4

    作者

     2

    고맙습니다. 그런 일 있습니다...

  • 李光仁(朋友)

     2

    안여사ㅡ 잘봤어요. 그때시절 억울한 모자쓰고 우파된 사람들 참 억울하지요. 리봉호 우리 동창이예요 2020.5.4

  • 李光仁(朋友)

     2

    云帆ㅡ 老师为人耿直,被打成右派,又坐牢,世道,冤狱,痛心。弟子为半个世纪以前的老师写传,感人!2020.5.4

  • 李光仁(朋友)

     2

    깜박 했네요. 오늘 련재 사진은 모두 리남붕선생의 따님 리초향씨 제공입니다 !!!

  • CHIHONGLIAN

     1

    기억속에서 잊혀져가고 있었는데  오늘이글 읽고 사진도보고하니 하나하나 기억이 떠오르네요 그때는 이남풍이라고 불러던것같은데 이남붕이네요 글을아주 생동하게 쓰셔네요 내가 우리오빠한테서 들어던 기억하고 똑갔습니다 우리오빠네 반주임 선생님이여서 그때들었던 생각이납니다 이남붕선생님은 문예 미술 다방면 못하는것이 없는 아까운 선생님이라고하셔지요.. 말이십지요 3년.5년 젊은인생다가고 그가족들은 얼마나고생 많았을까요 딸님이똑똑 하신것같네요 오래된  옛날사진들하고 그가족의 역사를뚜렷이 기억도잘하고 이렇게 토산자 분들에게 알려주셔서 다시떠올려보는 그런계기가 되였습니다 그리고 자녀분들은 어릴때떠나서 기억이 잘안나는데 사진에 우리고향후배들 사진보니 너무기억이뚜렷하고 반가워습니다 긴글 올려주셔서  잘보았습니다 잊혀져기던 옛날생각도 다시해봤구요

    作者

     1

    고맙습니다. 그럼 오빠도 박원철, 신순옥 등 선배님들과 같은 반이였네요...

    CHIHONGLIAN

     1

    우리오빠도 신순옥이랑 같은반 동창입니다

  • 李光仁(朋友)

     1

    zjzㅡ 초향 아버지 억울한 루명 쓰고간 재료가 1983년도에 제가 그 자료를 본 기억이 납니다. 파출소에서 당안을 정리하다 보았습니다. 그때 그자료들을 처리한 걸로 기억납니다 2020.5.4

    作者

     1

    그 시절 토산파출소 였는지요?!

  • 李光仁(朋友)

     1

    주청룡ㅡ 저런 억울한 사건이 없어야 하는데 2020.5.5

  • 李光仁(朋友)

     1

    리초향ㅡ 저의 기막힌 가정사를 붓의 힘으로 이렇게 적어주신 교수님 덕분에 가슴에 맺혔던 응어리가 쑥 내려간 느낌이예요. 덕분에 천상에 계시는 아빠께서는 눈을 감으시고 한을 풀것같아요. 고맙습니다 ! 2020.5.5

  • 李光仁(朋友)

     1

    리초향ㅡ 정금자 저의 동창생이예요ㅡ연락되지 않았는데 선생님 덕분에 여기에서 금자 여러 메시지 들어보네요ㅡ 2020.5.4

  • 李光仁(朋友)

     1

    리초향ㅡ 언론의 힘이 대단합니다 .선생님 덕분에 몇십년 지난 오늘에도 아버지 리남붕선생님 기억하는 분들 있다는것을 2020.5.4

  • 李光仁(朋友)

     1

    리초향ㅡ 눈물이 나네요 2020.5.4

  • 박하나

     1

    저도 토산소학교 졸업생이고 리남붕선생님의 하나밖에 없는 딸 초향의 친구얘요. 친구의 아버지께서 억울한 루명을 쓰고 고생하는 긴세월동안 저의 친구와 형제들은 아버지를 사무치게 그리면서 정말 힘들게 살아왔어요. 옆에서 지켜보는 친구로서 가슴이 엄청 아팠어요. 인젠 아버지를 위해 딸로서 훌륭한 일을 해냈으니 인젠 당당하게 살았으면 좋겠어 . 리광인 선생님 고마워요.

  • 李光仁(朋友)

     1

    리초향ㅡ 잘 보고 감사합니다. 우리 아빠 아시는 분들 참 많네요. 눈물 흘리고 있어요. 아빠의 훌륭한 학생이 계시기에 이렇게 만천하에 아빠의 억울함을 얘기 해주시는 분이 계시기에. 복 받으실꺼예요 2020.5.4

  • 李光仁(朋友)

     1

    리초향ㅡ 리초향의 인생에서 가장 기쁘고 뜻깊은 날입니다. 우리 가족은 선생님을 일찍 만났어야 되는데 너무 아쉽습니다. 고맙습니다. 리광인 선생님 ! 2020.5.4

  • 李光仁(朋友)

     1

    동창친구님, 최인수형님도 리남붕선생이 담임교원을 맡았던 학급학생이 였네요 !!!

  • 李光仁(朋友)

     1

    태경준(고향 후배)ㅡ 자료도 없는 원고를 쓰시느라고 수고 많으셨습니다 ! 2020.5.4

  • 李光仁(朋友)

     1

    권정옥ㅡ 특정된 력사시기 억울한 모자를 쓰고 한많은 인생을 살다가신 선생님께서 제자의 지성어린 노력으로 이젠 고이 잠드실수 있을것 같습니다! 2020.5.4

  • 李光仁(朋友)

     1

    김화자ㅡ 옛날 흑백사진, 잘 보관된 빛 바랜 사진들 속에 추억이 담긴 이야기 많이 있는 것 같아요 2020.5.4

  • 李光仁(朋友)

     1

    최숙ㅡ 기억나요   내가 알기론 ... 새벽에 붙잡혀 갔는데 그때 잡혀갈 때 우리 아버지도 그 현장에 같이 참석하고 돌아와서  붙잡혀 갔다고 아침  자시면서 말하던 기억이 나네요 2020.5.4

  • 李光仁(朋友)

     1

    知足常乐ㅡ 고향의 사진과 회고글을 올린다는게 참으로 대단한 발상입니다2020.5.4

  • 李光仁(朋友)

     1

    최진옥ㅡ 조글로를 통해 또 고향의 소중한 인연 만났네요. 축하드립니다. 억울한 사람  억울한 사건이 많았던 력사, 생각만해도 가슴이 아픔니다 2020.5.4

  • 李光仁(朋友)

     1

    云帆ㅡ 郑今子老师 李光仁教授 原来二位是老乡啊2020.5.4

  • 李光仁(朋友)

     1

    zjzㅡ 올린 사진 잘 보았습니다. 세월이 흘러 어릴 때 제 모습도 못찾아 보겠네요. 제가 리초향 소학교시절 동창입니다. 덕분에 어릴 때 소중한  모습 찾아볼수 있어 감사합니다2020.5.4

  • 李光仁(朋友)

     1

    박경옥ㅡ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2020.5.4

  • 云帆박삿갓

     1

    조선에서 낯선 중국땅으로 살길 찾아온 사나이,강직하여 우파모자 쓰고 감옥살이하고 참으로 원통스럽고 저주로운 세상살이를 겪었군요. 반세기전 스승의 생애를 소상히 쓴 제자의 덕성,참으로 우로러 보이오이다.


李光仁 朝鲜族足迹



  • 력사학자 리광인   

    리광인 (李光仁)


    리광인 프로필 (필명 리함)


    ▲ 길림성 화룡시 태생

    ▲ 1982년 연변대학 조문학부 본과 졸업

    ▲ 연변일보사, 연변력사연구소, 절강월수외국어대학 한국어과 교수로 근무하다가 퇴직.


    저서 (30부)

    《겨레 항일지사들》 (전6권)

    《조선족력사문학연구문집》(전2권)

    《광복전 겨레 작가론》

    《홍군장령 양림》(평전)

    《백포 서일장군》(평전)

    《최음파평전》

    《무정장군》(평전) 등


    주요수상 

    2006년 “연변문학” 윤동주문학상 평론본상

    2013년 “연변작가협회” 실화문학 대상(《》홍군장령 양림)

    《홍군장령 양림》(평전). 2011년 중국작가협회 국가급중점작품지원프로젝트 획득

    《무정장군》(평전). 2013년 중국작가협회 국가급소수민족중점작품지원프로젝트 획득 등


    [부록] 리광인 저서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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