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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길 | 민창사회구역의 세 보배 할머니

길림신문 朝闻今日 2020-09-09


연길시 신흥가 민창사회구역은 연길도심의 신흥광장에 자리잡고 있는데 2091가구의 5577명 주민이 거주하고 있는 비교적 큰 사회구역이다.



이 사회구역 당총지 서기이며 주임인 김향숙은 “우리 사회구역이 ‘전국 혁신형 사회구역건설 시범사회구역’, 길림성취업선진사회구역, 주급 시범사회구역, 연길시5호사회구역 등 허다한 영예를 지닌 데는 물론 사회구역 사업일군들의 로고도 들어있지만 우리 구역에 살고 있는 로인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매우 크다.”고 하면서 3명 할머니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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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부지런하고 다면수인 ‘선생님’ 강금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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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수공예작품을 만들고 있는 강금성할머니.


올해 75세 나는 강금성할머니는 2006년부터 민창사회구역 로인협회 회장, 새일대관심사업위원회 보도원 등 직책을 맡고 열심히 일해온 분이다.


강로인이 사회구역에서 회장이라는 직명보다 ‘선생님’이라는 호칭으로 많이 불리는 데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강로인이 북경대학에 입학한 아들의 뒤바라지를 위해 북경에서 생활하다가 남편과 함께 민창구역에 와 거주하게 된 것은 1998년 봄이였다. 당시 신흥가두에서 어머니를 노래하는 주제로 합창콩클이 있었는데 경연을 며칠 앞두고 한 배우의 가정에 일이 생기는 바람에 합창단 공연에 차질이 생겼다. 이사온 지 3일 밖에 안되는 강로인은 사회구역합창단의 안타까운 사연을 듣고 선뜻이 나서서 짧은 시간내에 노래를 배워내고 열심히 련습하였는데 그번 콩클에서 합창단은 금상을 받아안았다.


그후 여러차례의 문예활동에 적극 참가한 강로인은 젊은 시절에 도문시에서 유치원 교원, 부련회 사업을 하면서 쌓은 노래와 춤 기본공 그리고 출중한 령도재능으로 기타 성원들로부터 ‘선생님’으로 불리우기 시작하였다.


로인협회 회장으로 당선된 후 강로인은 로인들의 업여 문화생활을 다채롭게 하기 위하여 로년대학을 다기고 서법을 배우고 민속무용을 배우는 등 노력을 경주하였으며 음력설이나 로인절, ‘3.8부녀절’과 같은 명절이면 로인들과 함께 독거로인 위문, 류수아동돕기 등 활동을 조직하여 서로 돕고 베푸는 분위기를 형성하였다.


지금 이 사회구역 무용대가 사용하는 거의 모든 무용복과 소도구는 강로인이 직접 만든 것들이다. “아들의 돌생일에 들어온 부조돈으로 산 마선이지요. 인젠 50년도 넘었지만 새것과 마찬가지이지요.” 강로인은 침대 옆에 놓인 마선을 가리키면서 말한다. “시부모님 옷도 만들고 아이들 옷도 만들었어요. 어데 가 복장을 배운 적도 없이 마선을 돌렸는데 모두들 마음 들어하니 점점 손재간이 늘어간 것 같습니다.”


그가 친히 만든 무용도구 또한 다양하다. 낡은 무용복을 개조하여 만든 무용 조끼와 부채는 물론 무용수들의 구슬 박힌 머리삔, 진달래꽃 등은 아직도 이 구역 무용대에서 즐겨 사용하는 무용도구들이다. 2015년 9월에 허리부상으로 큰 수술을 받았지만 그는 불편한 몸으로 40여개의 무용도구를 제작하고 60여개의 꽃쌈지와 꽃방석 등 수공예품을 만들어 사회구역 로인들에게 선물로 주었다.


마선을 돌리고 있는 강금성할머니.


그 뿐만이 아니다. 부모를 조실하고 고아원에 입양된 이 구역의 김성기학생을 위해 그는 7년 동안 옷과 학용품을 사주었으며 고아원에 갈 때마다 고아원의 다른 애들과 나누어 먹을 수 있도록 많은 식품과 옷을 가져갔는데 어느 한번은 단꺼번에 30여벌의 옷과 신을 가져간 적도 있다.


그가 로인협회 회장으로 있은 12년 동안 사회구역 선진개인, 선진공작자, 우수사회구역행정조장 등 영예를 수차 받아안았으며 그의 가정도 연길시 ‘가정사랑조화모범’ 등 영예칭호를 수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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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옷 살 줄 모르는 조장할머니 장련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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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거로인들을 찾아 정황을 료해하고 있는 장련옥할머니(왼쪽).


올해 78세 나는 장련옥할머니는 신흥광장 서쪽켠의 낡고 헐망한 6층 건물에 거주하고 있는데 그 주민소조의 조장이다.


연길93공장에서 퇴직한 로공산당원인 장로인은 이 건물에서 23년동안 생활하였다. “그 때까지만 해도 이만한 건물은 연길시에 몇개 없을 정도로 최고급이였지요.”


그가 가리키는 집은 연길시 도심에 자리잡은 불때는 온돌집이다. 밖에 벽돌로 지은 창고는 바람에 기와가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낡았는데 비가 새고 바람에 기와가 날려가는 것을 막기 위해 그 우에 비닐박막이나 널조각을 펴고 쇠줄이나 바줄로 고정하다보니 우에서 내려다보면 정말 가관이다. 찬바람이 그대로 불어치는 층계도 마찬가지다. 세월의 무상함과 수많은 이야기를 담은 층집임이 틀림없다.

장로인의 이야기도 건물의 나이만큼 거슬러올라가 1992년도부터 시작된다. 그 해에 퇴직한 장할머니가 집에 앉아 텔레비죤을 보는데 갑자기 층계에서 낮다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알아보니 이웃집 리순희(96세)할머니의 울음소리다. 아들며느리가 리혼하고 집에서 손자를 돌보는데 그 손자가 불시로 두다리를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이다. 장로인은 금방 타온 로임 35원에서 20원을 꺼내 리할머니의 손에 쥐여주고 함께 병원에 가서 입원수속까지 도와주었다. 할머니와 손자가 얼마 안되는 최저생활보장금으로 생활한다는 것을 료해한 그는 매번 학비를 낼 때마다 돈을 보내주었고 옷과 먹을 것을 사주군 하였다.


장련옥할머니.


리할머니의 손자가 후날 훌륭한 성적으로 대학을 마치고 미국의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마쳤는데 손자 때문에 리할머니가 2만원의 빚을 진 사실을 알고 장련옥은 “최저생활보장금을 모아서 천천히 빚을 갚으세요. 앞으로 할머니가 먹고 입고 쓰는 것은 제가 책임질게요.” 하고 말했다.


그 후 장련옥할머니가 장마당에서 사오는 쌀, 기름, 고기, 남새는 꼭꼭 두 몫이였다. 2013년 그녀가 21년간 도와준 리할머니의 손자는 결혼식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큰 어머니(장련옥)가 없었으면 우리 가정의 오늘이 없고 나의 오늘이 없었을 것입니다. 큰 어머니는 나의 친 어머니입니다.”


장로인이 도와준 사람은 이들 뿐이 아니다. 올해 90세 나는 채금순할머니, 시력장애자 방춘길과 그의 어머니 역시 그녀의 살뜰한 도움으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웃으면서 살아가고 있다. 색다른 음식이 생기면 그녀는 세집 식구들을 불러 한집에서 맛있게 먹으면서 이야기꽃을 피우군 한다.


기실 장로인 역시 넉넉한 형편은 아니다. 퇴직금이라야 1700원 밖에 안되고 거기에 2013년도에 남편과 아들이 차례로 저세상으로 가다보니 의지가지할 데가 없는 처지다. 남을 도와주고 관할구역의 정전, 수도관 파렬, 주인 없는 낡은 집 창문유리가 바람에 떨어지는 등 건물내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들을 일일이 나서서 해결하자면 전화비용도 만만치 않다.


“내가 조장이니 내가 관련부문과 련계해야죠.” 장로인은 한달에 150원씩 나오는 전화비를 아끼기 위하여 2000년도부터 광천수병이나 신문지와 같은 돈이 될만한 쓰레기를 주어 팔기 시작하였는데 벌써 18년이나 된다고 한다.


얼마 안되는 로임을 쪼개고 쪼개서 여럿이 살아가다보니 장련옥할머니는 새 옷을 사입은지도 까마득한 옛날의 일로 되였다. “80이 래일 모렌데 새옷을 입고 시집가겠수? 이만한 옷이면 옛날엔 시집을 열번이라도 갔을거요. 허허…” 장로인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깨끗이 빨아입은 옷을 내보인다.


이같은 노력으로 장로인은 2015년에는 ‘3강3애 감동 연길사람’으로, 2016년에는 ‘연변주 좋은 사람’으로 평의되여 표창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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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뜸 리발사, 신문배달원 우계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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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년을 매일과 같이 신문배달을 해온 우계향할머니.


올해 73세 나는 우계향(한족)할머니는 민창사회구역의 리발사, 신문배달원으로 소문이 높다.


열정적이고 신세를 지면 꼭 갚는 성격인 그는 원래 리발업을 하던 리발사였는데 1972년에 연변병원제약공장의 로동자인 남편을 따라 연변병원제약공장에 출근하였다. 그런데 남편은 정식공이고 그녀는 림시공이다보니 그녀에게는 퇴직금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휴식시간을 리용하여 환자들의 머리를 리발해주고 지어는 환자가족의 요구대로 사자의 머리를 리발해주기까지 하였다.


퇴직한 후 사회구역에 나와서 활동에 참가하면서 그는 명실공히 사회구역의 리발사가 되였다. 일전도 받지 않고 무료로 리발해주었는데 로인들이 아무 때나 찾아도 싫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연길에서는 머리를 최고로 잘 깎는 사람이요. 우리가 돈을 주어도 받지 않는다오.” 장기를 두던 박로인이 우계향을 가리키면서 엄지를 내든다.


“제가 사회에 감사를 드리고 보답해야 하지요.” 우로인이 항상 하는 말이다. 퇴직금 대우가 없던 그녀가 국가의 ‘57공’우대정책으로 퇴직금 대우를 향수한 것은 2011년부터였다. 그녀는 국가에 감사하고 정부에 감사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퇴직금이 많은 것은 아니다. 처음엔 560원을 향수했고 현재는 800원이 되였다. 그녀는 남편의 퇴직금으로도 살 수 있다고 하면서 사회구역 김서기를 찾아와 빈곤호를 돕겠다고 나섰다.


그녀는 늘 과일을 사들고 조선족 독거로인들인 채금순, 방정숙 할머니를 찾아 이야기를 나누면서 동무하여주고 움직이기 불편한 그들을 도와 석탄재와 쓰레기를 버려준다.


70이 넘으면서 우계향도 당뇨병이나 백내장 등 질병으로 운신하기 힘들게 되였다. 하지만 그녀는 12년을 매일과 같이 사회구역 의무배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수십종의 신문, 간행물을 분류하고 1층부터 3층까지 10여개 사무실에 신문을 배달하고 거리가 먼 로인활동실까지 다녀오자면 그녀의 걸음으로 반시간이 걸리지만 그녀는 하루도 빠짐이 없이 신문을 배달한다. “신체단련 삼아 시작했는데 인젠 습관이 되여버렸어요. 사회구역을 한고패 돌지 않으면 무슨 일을 하지 않은 것처럼 자꾸 불안해진다니깐요.”


우로인 역시 수차 ‘뢰봉따라배우기 선진’, 연길시‘도덕모범’ 등으로 표창받았다.


전반 지구촌이 로령화사회로 진입하는 현재 농촌마을들 뿐만 아니라 도시 사회구역의 모든 활동에도 점차 로인들이 주역으로 나서는 시대가 되였다. 사회구역의 주요한 활동들이 로인들을 중심으로 한 봉사활동이 위주이기 때문이다.


김향숙 서기는 년세가 70세 이상인 보배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이들은 모두 뢰봉의 대공무사한 정신으로 항상 자신을 비춰보는 산뢰봉들이라고 하면서 사회구역 일군들은 이들을 따라배워 구역 주민들을 위해 더 열심히 봉사해 갈 것이라고 표시하였다.



길림신문 김태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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